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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바실리오 공동체와 수도승 전통

여행길 2013. 6. 28. 11:58

p3

복음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이 모임이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서로간의 특권과 천대가 배제된 사랑의 공동체였으며, 사회와 교회 안에서 친교를 구체화 하는 공동체였다. 나눔과 복음의 가치를 살아감으로써 상호존중과 인격적 나눔이 사회 안으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대조사회의 공동체였다.

 

p7

이 논의를 통해 초대 교회공동체의 친교적 가치를 사막에서 교화안으로 회복시키고, 다시 교회 안에서 사회로 확장시키려 했던 바실리오 특유의 노력들을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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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특정한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복음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친교 공동체라는 점을 재인식하고자 한다.

 

p9

357년경 바실리오는 세례를 받게되고 수행생활의 다양한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일종의 수핵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치우침이 없고 신중했던 그는 경험을 넓히고 싶었으며, 동방에 성행하던 그리스도교 수행자들 집단과 접촉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음식에 대한 그들의 절제, 일에 있어서의 내구력, 기도에 있어서의 항구함, 그리고 육신의 멸시에 드러나는 예수의 죽음과 천국시민 다움을 주목한 다음, 나역시 할 수 있는 한 이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고 싶었다고 덧붙인다. ...

폰투스에 머무르는 동안 바실리오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엄격한 금욕적 생활을 한다.

 

p14

무엇이 그리스도인 본연의 것인가로 요약된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인의 표시로 구분되는 것이란 어던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에 활기를 갖는 믿음이다....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꼐 영광을 드리려는 지향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것으 무엇일까? 그것은 날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깨어 있는 것이고,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완전한 상태 속에 있는 것이며, 미리 예측할 수 없는 날 어느 시간에 갑자기 주님이 오실 경우에 깨어 있는 상태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p17

바실리오 규칙서는 체험의 정화를 요약시켜 놓은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몸소 체험한 것과 다른 무엇을 가르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p36

공동체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 때, 그 생활은 싸움터이며 앞서 나아가는 좋은 길이고 주님의 계명을 꾸준히 실습하고 가꾸는 곳이다.

 

p43

즉 무엇보다 그는 겸손해야 하고 표면에 나서지 않는 방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생활이 그들을 위한 모범이 되게 해야 한다. ...그는 각자의 개인적 요구에 주의깊게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p48

너는 누구에 대해 마지막이 되겠느냐? 네가 홀로 고독하게 살면 너는 누구를 겸손과 자비로 대하겠으며 누구의 발을 씻고 누구를 섬기려느냐? 이와 같이 형제들이 더불어 사는 것은 싸움터이며 진보의 좁은 길이고 계명을 꾸준히 수련하는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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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는 수도자들로 하여금 입술로 하는 기도의 중요성 뿐 아니라 노동을 하면서 마음으로 하는 기도의 중요성 또한 가르치고자 했다.

 

p49

사도는 빈곤한 자를 구하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이루라고 명령한다....왜냐하면 우리는 경건하게 산다는 목적을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

노동을 행하는데 있어서 바실리오는 몇 가지 조건을 강조하고 있는데, 침묵과 명상이 병행될 수 있는 것에 한해서 노동을 허락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농사, 구두 수선, 목공 등은 침묵하고 명상할 수 있기에 노동으로 허락된다. 특히 여자 수도자들에게는 빵 굽는 일과 옷감 짜는 일들이 노동으로 허락될 수 있었다. 또한 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수도자는 형제들의 힘과 능력을 잘 파악하고 고려해야 하며 형제들로 부터 불평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했다.

 

바실리오에게 있어서 포기란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형태의 부정적인 경향을 멀리하는 것이었다. 이 부정적인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깨끗히 하여 하느님 앞에 언제나 겸손한 자로 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포기르 ㄹ들고 있기 때문이다. ...

마태오 16장 24절에 따라 먼저 자신의 친척들, 일반 세상에서의 친구들 몸에 익은 삶의 방식들 등을 모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복음에 따라 물질적인 소유도 포기할 것을 요청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제물이나 사라져 없어지고 말 것들을 우리 자신을 위해 간직해 둔다면 우리의 정신은 마치 쓰레기 속에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속박되고 말 것이고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 세상의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세상의 고통들에 매인다면, 그리고 이 세상의 제물과 삶의 걱정들에 의해 속박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분노, 슬픔, 걱정 등 한마디로 말해서 없어지고 말 이 세상의 고통들에 의해 시달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회개와 정신의 겸손에 이를 수 있겠는가?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 포기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는 덕목은 형제와 자매를 궁핍과 가난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는 육체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 주어야 한다.

지도자는 일을 각 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고려하여 나누어 주어야 했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고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라고 보았다. 다른 어떤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는 자세로 일해 나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