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윌버 지음 / 김재성, 조옥경 옮김/ 한언
p128
18세기 영국의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죄, 죽음, 저주, 지옥이란 다름 아닌 자아의 왕국일 뿐이다. 그것은 결국 영혼을 신으로부터 분리해 영원한 죽음과 지옥에 귀착시키는 자기애, 자만, 자아에 대한 추구일 뿐이다."
p129
요가는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시성과 개인의 영혼을 결합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모든 지혜의 전통에서 2갈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와미 람다스 Swami Ramda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자아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자우를 무(無)로 축소해나가는 방버이다. 전자는 지식(지혜)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헌신(신앙)에 의한 것이다. 쥬냐니Jnani(지혜를 가진자)는 말한다. '나는 신이고, 보편적 진리다' 헌신하는 자아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이여, 당신이 전부입니다. " 어느 길에도 자아란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길에 들어선 사람 모두 작은 자아를 넘어서, 자신이 보편적인 영성이라는 지고의 본성을 재발견한다는 것입니다.
p133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은 이기심 없는 봉사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대사, 똑같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신체, 똑같은 법신(法身)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따라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자기자신, 즉 진아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는 분명 '당신의 진아로써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생각합니다.
p144
"내가 좋아하는 격언이기도 하오.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이오. 즉, 호흡이나 다른 감각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방법 말이오. 그렇지만 티베트인은 숨을 내쉴때 '내 마음을 전 우주와 혼합하고', 혹은 실제로 '마음과 하늘을 혼합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수행을 해요. 즉 숨을 내쉬는 것과 함께 자신의 분리된 정체성을 토해내, 눈앞에 펼쳐진 허공 속에(다른 말로 하면 우주 전체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지. 이 수행은 대단한 힘이 있소."
라마나 마하리쉬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는 2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아를 그 근본부터 철저하게 캐내는 것, 즉 '나는 누군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이나 신에게 다 맡겨 그것으로부터 자아를 깨는 방법. 두 방법 모두 자아는 소멸시키고 빛나는 진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길.
p151
분리되거나 소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보고 있는 당신 자신이 보이는 당신 자신이지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분리나 단절은 없고. 오직 분명하고 빛나며, 도도히 흐르는 경험만 있을 뿐이오. 나라는 존재는 지금 생겨나는 모든 것이지. 도겐의 위대한 말을 떠올려 봅시다. "부처의 길을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 것은 만물(萬物)과 하나가 되어 만법에 의해 깨닫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그런 궁극의 상태를 '유일한 자아'라는지 '일심(一心)이라고 부르곤 하지요. 하지만 이때의 대아는 만물과 하나임을 뜻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전혀' 자아'가 아니에요.
p167
적절한 음식을 섭취하여 음양의 균형을 최적화하려는 생활방식. 매크로바이오틱스 운동은 1965년에 <젠매크로바이오틱스 Zen Macrobiotics>를 출판한 조지 오사와(1893-1966)가 시작했다. www.kushiinstitute.org참조. 우리말 저술로는 <매크로바이오틱스 건강법, 기준성, 2003, 태웅출판사>가 있다.
p168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의식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군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소모감이나 눈물의 주된 원인은 제어하려는 자아의 욕구에 있다는 통찰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일에 대한 결정을 그만두고 신에게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자아를 내세우던 지난 한 해는 두려움와 우유부단, 그리고 죽음의 심연과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올해 나는 고집을 버리는 대신 진정한 수용을 배워 평화로움을 느끼고, 호기심을 만족시키며,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것은 아마 삶과 죽음이 사람들이 소란 피울 정도로 큰 문제가 아님을 더 깊이 느꼈기 때문이리라. 어찌된 영문인지 삶과 죽음, 이 둘의 경계선이 희밀해졌다....'얼마나 오랫동안 사느냐'는 인생의 길이보다, '어떻게 사느냐'는 인생의 질이 중요하다...이 옛 말은 나에게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p182
이 근원, '태풍의 눈'은 소용돌이와 같은 불안이나 괴로움의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맑은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관찰하는 중심점을 찾아내는 것은 폭풍우 때문에 거칠어진 파도를 뚫고 조용하고 안전한 해저 깊이 잠수해 들어가는 일과 흡사하다. 처음엔 격렬하게 흔들리는 감정의 물결 아래로 1,2m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 잠수를 시도한다면, 당신은 영혼의 조용하고 깊은 곳을 향해 바닥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바닥에서 당신은 몸을 펴 가로 눕는다. 깨어 있는 상태로 해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지만 표면의 혼란에 대해 초연한 의식 세계를 유지하게 된다.
p291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운지! 그저 사는 것만으로 족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행동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지나치게 남성적이고 행동에 중점을 둔 이 사회의 가치들을 버리자. 여성의 영성, 신의 여성적 면이라는 전반적 문제를 풀어가자. 한 장소에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고 거기에서 무엇이 자라나는지 바라보자.
p298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암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으로 나아가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 무언가 베풀어줘야 할 사람이 아닌,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암환자와 함께하는 것.
p301
그러나 지금 나는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고 만드는 즐거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것이 바로 켄이 말한 디먼의 발견일까? 나의 디먼은 격렬하지도 않고, 정신에 속한 것도 아니며, 그가 성취하려는 엄청난 업적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제 나는 자각했다. 나의 것은 조용하고, 형태가 없으며, 부드럽다. 배경적이고 여성적이며 보이지 않는다. 몸과 관련된, 대지와 관련된 그것, 그러나 내게는 더욱 실제적인!
p329
그리고 내겐 딱딱하고 까다로운 태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교정하려는 경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태도를 내 방식으로 삼을 필요도 없고, 통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삶에 '올바르다거나', '정확한' 문법이 있따고 생각하는 태도도 많이 줄어들었답니다. 그래서 뭔가에 화를 내거나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이제 나는 자신과 타인들을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려고만 합니다.
나는 자신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친절해졌습니다. 나는 내 삶을 이끄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충만하고 성공적인 삶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p 333
위빠사나에서는 그저 편안한 자세(가능하면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아서, 판단하거난 비난하거나 쫓아가거나 피하거나 갈구하는 것없이, 내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선택 없는 주의'를 기울인다. 편견 없이 바라본 후에 보내는 것이다. 이 수행의 목적은 '분리된 자아는 실재하거나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고 덧없는 감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아라는 것이 얼마나 '비어 있는 것인지'를 알아차리면 자신과 자아를 동일시하고 자아를 방어하고 자아를 걱정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실존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방어하는 데서 오는 만성적인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해방된다....
소숭이 자신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면서 타인의 깨달음은 도외시한다는 점이다.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자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p337
통렌수행을 통해 트레야는 모든 고통에 대한 자비심ㅁ을 자꾸만 키워나갔다. 그녀는 모든 존재가 고통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들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통렌에 숙달한 사람은 고통이나 불안, 우울함을 느낄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이 모든 고통을 꺼안기를"이라며 숨을 들이켜고, 날숨과 함께 그 고통을 해방시킨다. 이것의 효과는 고통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고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통에 직면해서 물러서지 않게 되고, 오히려 고통 받는 모든 존재와 연결될 수 있다. 우주적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고통을 변화시킨다. 고통스러운 상황은 더이상 당신과 당신만의 고립된 무엇이 아니라 상처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고, '내 형제에게 하는 것은 내게 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통렌을 하면 고통에 거리를 두지 않게 된다. 오히려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자비심이 가득한 방식으로 고통과 연결된다. 더 이상 고통으로부터 물어나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고통을 초래한 것은 무엇이며',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특별한 이론을 자내지 않는다.
p338
우리는 그 끔직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론과 이야기에 수년 동안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왔을 그 친구가 한마디 했다...."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가 물었다. "너는 어머니에게 이론을 적용하면서, 어머니를 물건처럼 다뤘던 거야. 하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 자신을 침해한다고 느꼈을 수 있어...그들이 말하는 '이론들'은 나를 돕기 위한 게 아니라, 내게 하가는 어떤 것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어. 그들은 내가 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운 거야. 그래서 암의 이유와 의미를 찾고 싶어해. 하지만 그 이론들은 결국 나를 돕는 게 아니라 자신들을 돕는 것이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듣는 일이었다....나는 모든 현상을, 자비심을 키우고 타인에게 봉사할 기회로 삼는 불교적 입장을 선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일어난 '좋지 않은'일들을 지나간 행동에 대한 징벌이 아닌, 과거의 업을 해소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
그래서 요새 나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거나, 암이 재발했거나, 혹은 몇 년 동안의 투병으로 점차 지쳐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나 조언을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말을 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이 그들에겐 도움이 된다. 듣는 것은 주는 것이다. ...진실로 두려워할 수 있게 스스로 허용한다면 아무리 끔직한 일이 닥쳐도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p371
살고 싶다는 내 의지가 강해지길 바란다.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난 완전한 중심, 헌신, 명확성, 집중, 올바른 노력과 더불어 결과가 어떻든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생활 할 필요가 있다. 고통은 형벌이 아니다.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그리고 삶은 보상이 아니다.
p377
상황이 나빠질 때 불교는 진정한 위안처가 되지요. 고함치고 절규하거나, 상황을 시정해보려는 개혁을 하기보다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고 수동적인 태도를 유도하는 것은 아니에요. 불교는 갈망과 혐오에서 벗어나 항상 올바르게 노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노력한다는 게 점점 더 쉬워져요. 결과에 덜 집착하면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씁니다 도달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고, 현재 일어나는 일을 탐구하는 데 신경을 더 쓰기 때문이에요.
p383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빈번한 요구로 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내 일부가 그런 연구들 덕분에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선량'하거나 '친절'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해도 되는 겁니다.
p399
심호흡을 하고 이완하라고 말한다. 과거에 대한 비난에서 비롯된 동기는 나를 해치기만 한다. 뭔가에 매달리는 자신을 인식한다 해도 그냥 내버려둘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자신에게 부드러워지자. 모르는 것과 함께하자. 항상 노력없는 노력, 선택 없는 선택, 동기 없는 동기라는 숫께끼. 목표에 대한 집착 없는 노력.
p403
플라톤.."한때 남자와 여자는 전체였지만 둘로 갈라졌다. 그 전체를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p410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듣는 일이나 시골길을 드라이브하는 일, 그런 일들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하며 내영혼을 살찌운다. 나는 그런 기쁨을 느낀다. 나는 내 병을 '때려 부수려'하지 않는다. 병을 용서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를 허용한다. "연민이란 공포를 느끼며 고통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순간에 주어진 것들을 바꾸고 싶게끔 한다....그러나 그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공포와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쓰다듬을 때, 그것은 자비가 된다."
p415
이제 나는 내 몸에 더욱 편안해졌다. 그리고 인정한다. 한쪽 가슴이 없고 몸은 비쩍 말랐지만 아직까지 상태가 괜찮은 내 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가? 하지만 종종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판단하지 않고 부드럽게 서로를 돕는 것이다...삶은 공정하지 않다고. 착한 행동에 대한 보상을 받을 권리는 없다고...결국 남은 것은 '많은 경우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단순한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모르는 땅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가! ...라마나 마하리쉬는 계속해서 말한다. "존재들은 신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열매를 거둔다. 그렇듯 책임은 그들의 것이지 신의 것이 아니다." 맞다, 나는 책임을 느낀다. 내 선택과 인생의 변덕, 우연과 유전, 전생의 역할을 인식하면서 내 삶의 도전에 반응하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비판적이고 영웅적으로써가 아니라 이해심 오린 자비로운 방식으로.
p416
라마나 마하리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당신은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나쁜 일에 대해서는 감사드리지 않는다. 거기에 잘못이 있다."...신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처벌하거나 보상해주는 신화적 부모가 아니라, 공평한 실재이자 드러난 모든 것의 본질이다. 매우 드문 경우긴 하지만, 이사야 Isaiah조차도 "나는 좋거나 나쁜 일에 똑같이 빛이 들게한다. 주인신 나는 이 모든 것을 행한다"라고 말했다. 선과악, 쾌락과 고통,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드러난 모든 것'과 '일미(one taste)'인 우주 전체와의 비이원적 일체감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라마나는 우리가 고통, 질병, 통증과 친해져야만 진정으로 전체, 즉 진아와의 더 크고 광범위한 일체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아는 삶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정하게 지켜보는 자이며, 원천이라는 것이다. 특히 라마나는 궁극적인 스승인 죽음과 친해지라고 말한다.
p415
좋든 싫든, 삶이든 죽음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간에 모든 드러남은 똑같이'일미(one taste)다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p440
암을 앓기 전까지 내가 배웠던 것은 열정이었다. 그리고 암을 앓은 후의 삶에서 나는 평정심을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이 둘을 함께 모은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삶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도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없다! 마침내 길이 분명해진 것 같다. '목적 없는 여행'에서의 길이.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기...열정적 평정심, 열정적 평정심. 아주 적절하다!
p442
토머스 키팅 신부가 한 말도 생각합니다. "의지의 주요 활동은 노력이 아니라 승낙(consent)이다. 의지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은 거짓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가 내적 자유라는 사다리를 오를 때면 그것은 점점 더 신의 도래, 은총의 유입을 승낙하는 것이 된다." 나는 그가 말한 '신'이라는 단어 대신 '영'이라는 말을 넣습니다....나는 키팅이 강조한 노력이 아니라 받다들이고 승낙하는 자세로서 매우 적극적인 개방을 좋아해요...그는 다사 이렇게 말합니다. "애쓴다는 것은 기도자의 성장에 필요한 수용성이라는 기본성향을 희석시킨다. 수용성은 비활동성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활동으로서 일상적 의미에서의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궁극적인 신비를 기다리는 태도다. 지금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심신이 정화되면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런 '적극적 비활동'이 내가 '열정적 평정심'이라고 생각하는 한 예입니다. 켄은 도교도들이 그것을 '위무위(爲無爲)'라 표현한다고 말해주었지요. 이글의 의미는 '행동 없는 행동'으로 종종 '노력 없는 노력'으로 번역된다는 말과 함께요.
키팅은 5-9개의 음절로 된 '적극적 기도'를 만트라처럼 사용 할 것을 권합니다. 나는 '영의 존재를 받아들입니다(consent to the presence of spirit)'라는 문구를 좋아해요. '받아들인다'라는 말은 내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 기도문은 매번 나를 일깨우며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p450
나는 모든 주의를 육체에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이 육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떠올리지요. "당신의 진정한 존재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being)다" 아직 직접 체험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떠올리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인간이 윤회라는 비애로 말미암아 제한되고 속박된다는 그릇된 인상을 없애는 데 모든 노력을 쏟을 뿐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길 좋아합니다. "헌신한다는 것은 신의 의지를 수용하고 당신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을 떠올리길 좋아해요. 그리고 "당신에게 다가온 좋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나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란 말을 되뇝니다.
p482
때때로 켄은 그것이 심리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우리가 한 일은 삶이라는 대양에서 파도를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배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답니다. 확실히 나는 속박 상태에서 파도를 타는 것에 대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한 때 나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의미와 목적'의 중독자였으며, 모든 것을 궁리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고, 모든 것에는 목적과 계획,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불교와 암은 '모르는 것'과 함께 사는 것, 삶의 흐름을 통제하려 애쓰지 않는 것, 사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놓아버리기를 통해 삶의 좌절과 실망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내게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얼마나 집착 속에서 행동 했는지, 내가 줄곧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어떻게 매순간을 활동으로 채우려 했는지를 기억합니다. ... 난 학생들이 항상 바쁘고 무언가를 배워야만 프로그램이 훌륭해진다고 생각했나봅니다. 학생들의 일과표를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채운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야 나는 그들에게 풍요롭고 다양한 경험과 단순히 존재하고, 서로 즐기고, 콜로라도산맥의 아름다움(색깔, 상쾌한 공기,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행복하게 젖을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똑같은 짓을 해왔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치유와 효소 프로그램에 집중하게 될 내년은 '작은 노인'의 해가 될 것입니다. 나는 최대한 늦게까지 자고, 적게 일하며, 매일 오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치료나 집중명상, 가족을 보는 것 외에는 여행도 최대한 줄일 겁니다...왜냐면 힘들게 짐을 싸고, 잃어버린 물건은 없나 걱정하고, 낯선 환경에서 커피관장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기보다는 차를 마시며 산을 바라볼 겁니다. 핀드혼에서의 완만한 생활리듬, 쉬고 명상하고 반성하고 친구들을 방문하고 정원을 거닐며, 늦은 오후의 햇볕을 즐기는 리듬을 따라갈 겁니다....
나는 항상 열정을 바치며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캠프 장소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놉니다. 하지만 불지필 나뭇가지를 줍고 말의 안장을 풀며 텐트 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정말 훌륭한 소녀였죠! 하지만 질병의 압력과 효소를 섭취하는 데서 오는 피곤함을 겪는 지금, 나는 내 삶이 더 단순명료해지며 더 넓어 짐을, 무겁지 않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잡동사니'를 없애 버리는 일이 날이 갈수록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느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내 모든 사진 기구들을 포기하는 것이...자질구레한 장신구와 화려한 술이 달린 스카프와 보석들을 친구들의 자녀에게 주는 것이 점점 더 쉬워집니다. 찬장과 옷장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바쁜 행동이 잦아들고, 점점 더 많아지는 낡은 '잡동사니'들을 처분하고 아직 밝히지 못한 삶의 목적이 계속해서 연기됨에 따라, 석양이 어둠으로 또 달빛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과 평화롭고 광활하며 울창한 숲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을 감상하면서, 빛 좋은 옥상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삶이 좀더 느슨하고 가볍고 투명해짐을 느낍니다.
p483
다음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낯선 사람이 당신을 도우려 할 때 싫다고 말하는것을 두려우하지 말라. 또는 당신의 영적 면역계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다...."자신을 신뢰하라. 스스로의 이해로 그들의 비판을 걸러내라, 해롭거나 힘을 약화시킨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당신을 약화시키고 두렵게 만들며 자신을 불신하게끔 만드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의 영적 면역계를 계속 작동시켜 득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해가 되는 도움은 거부하라."...
EST(융의 심리유형론 근거의 성격유형지표:현실적인 문제해결에 능하며 실제적이고 실용적인일들을 좋아하는 성격)유형의 심리학자는 "지금 이순간 내면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느껴지나요?" 나는 "아뇨, 난 지금 행복한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 그렇지 않아요, 분명히 있습니다. 난 그 아이를 아주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어요.", "분노라고요?" 내가 물었다. "아뇨 분노보다 훨씬 강한 폭력, 격분한 폭력이에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통찰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가능한 한 분명하게 설명했다. 문제는 그녀로 인해 내가 무기력해졌으며, 무언가 침해당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치료사로 청하지도, 그녀를 나의 사적 세계로 초대한 적도 없엇다. 우리 사이에는 신뢰가 형성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매우 부적절한 상황에서 내게 퍼부은 거나 다름없다고 설명하려 애썼다. 게다가 그녀는 힘을 가지고 자신이 옳은 척했다. 그녀가 한 말은 사실인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위해 그녀는 자신이 힘이 있고 옳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누군가 통찰을 얻도록 도움을 주는 데는 신경 쓰지 않았다.
P486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확실히 알려져 있지도 않지만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 죽을 거라는 사실입니다....이것은 보편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포를 인식하고 그 공포로부터 도망가고...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공포를 무서워하면서 거기에서 도망가는 것은 비겁함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전율하게 놔두고 그 전율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마음의 유희입니다. 그 순간 공포와 용기를 감싸는 자각에 대한 깨달음이 밝아옵니다. 기쁨, 혹은 확신의 깨달음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책감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다른 사람에게서 공포와 용기를 동시에 인식하고, 그들이 이런 공포를 인식하고 용기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 이것이 자비입니다.
p487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맞지 않아요" 혹은 "아니요. 당신은 나의 적합한 치료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느끼길 바란다...자신을 믿어라. 자기 마음의 면역체계를 신뢰하라. 자신의 존재 속에 굳건한 중심이 되는 것을 찾도록 애써라.
p492
'신에게 내맡김(surrender to god)은 아직도 내가 외고 다니는 만트라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했다. "신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에게 내맡기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라. 신의 즐거움을 기다려라. 신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내맡김이 아니라 명령이다. 신에게 자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청하면서 그의 뜻을 따랐다고 할 수는 없다...모든 것을 전부 신에게 맡기라." 예전에는 내맡김을 아주 약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내맡김의 성질을 탐구하면 할수록, 그것을 통해 나는 사물을 통제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정심을 가질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인 '이미 항상'이라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항상 깨어 있고, 이미 항상 진아와 하나이며, 이미 항상 전공간과 하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드러나 있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일의 현재의 영원한 자각에 대한 진실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자신의 욕망을 종교로 채웁니다. 결국에는 진아로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많이 헤맨 만큼 궁극에는 진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곳에서 진아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까? 은총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은총은 진아입니다. 진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지금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p502
숭고한 괴테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귀를 남겼다. '잘 익은 것들은 모두 죽고 싶어 한다.' 트레야는 잘 익었으며 죽고 싶어 했다. 그녀가 일기장에 쓰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전 생애를 요약하는 말이라고. 우아함과 용기. 존재하기와 행동하기. 평정심과 열정. 포기와 의지. 완전한 수용과 사나운 결심....그녀 영혼의 양면성, 일생 동안 그녀가 씨름해온 양면성, 그녀가 마침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통합한 양면성, 그것이 그녀가 남기고 싶어 했던 마지막 메시지 였다. 나는 그녀가 그 양면을 결합하는 것을 보았고, 균형잡힌 조화로움이 그녀 삶의 모든 면에 스며 있음을 보았고, 열정적인 평정심이 그녀의 영혼을 정의하는 것을 보았다.
p511
가슴이 무너졌다. 다 프리 존의 구절이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사랑의 상처를 연습하라....사랑의 상처를 연습하라.' 진정한 사랑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당신을 완전히 취약하게 열어놓는다. 진정한 사랑은 당신을 훨씬 넘어선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당신을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사랑이 당신을 산산조각 내지 않았다면 당신은 사랑을 모르는 거다. 우리는 둘 다 사랑의 상처를 연습했고 나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되돌아보면 그 단순하고 직접적인 순간에 우리는 둘 다 죽어버린 것 같다.
p513
우리 두 사람의 스승인 다 프리 존은 트레야의 40번째 생일에 이런 말을 했었다. 궁극적이니 깨달음의 비전은 그 사람이 순수하고 하얀색을 띤 밝은, 유한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선 다섯 꼭지점의 우주별, 혹은 만다라를 보았을 때 나타난다고....그녀가 소중히 여긴 유일한 보석은 수와 래드가 그녀를 위해 만든 금으로 된 다섯 꼭지점의 별 펜던트였다. 그리고 그 별은 트레야가 자신의 비전을 실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언어로 말하면 '보이지 않는 내적 은총의 눈에 보이는 외적 표시'라고 생각했다.
훨씬 넘어선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p514
돌아보면, 마지막 여섯 달 동안 트레야와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서로를 위한 영적 시련에 들어갔던 갔다. 나는 돌보는 이로서 할 수 있는 한탄과 불평을, 그녀에게 봉사하기 위해 내 경력을 5년 동안이나 밀쳐두어야 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한탄과 불평을 마침내 그만두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버렸다.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존재에 그녀에게 봉사한 그 특별한 은총에 감사 할 뿐이다. 트레야도 자신의 암이 내 인생을 얼마나 '파멸시켰는지' 한탄하고 불평하는 걸 그만두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 시련을 통해 그녀를 돌볼 약속을 심오한 수준에서 함께한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심오한 선택이없다. 우리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상대와 바꾸면서, 그리하여 나와 타인을 초월하는, '나'와 '나의 것'을 초월하는 영원한 영을 일별하며 서로에게 봉사한 것이다....
"당신을 위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 여기 있소."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이유예요." 하지만 그것은 나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 특별한 마지막 몇 달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 되었다. 트레야에 대한 나의 지속적인 봉사는 그녀에게 감사와 친절이라는 거의 압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보답으로 그녀가 준 사랑은 내 존재를 흠뻑 적셨다. 나는 트레야로 인해 완전히 충만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행해왔던 각성된 자비심을 서로의 내면에서 일으키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의 욕구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가운데 수년 동안, 혹은 몇 생 동안의 내 업이 불타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자비심 속에서 트레야 또한 완전히 충만해졌다.
p523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삶에 더욱 신경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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