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이현주
샨티
p19
1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보려면 하루하루 앉고 서고 눕고 걷고 움직이고 가만 있음을 살피라 했거니와, 때가 되어 고요함을 깨고 일어나 잠시 움직임으로 들어갔다가가 다시 때가 되어 움직임을 그치고 고요함으로 돌아간다.여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 있거늘 이보다 자세하고 친절한 가르침이 어디 있으랴?
밥 먹을 때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심음 무슨 일이든지 때를 당기지도 말고 미루지도 말라는 가르침이요. 옷을 입으심은 유화인욕의 옷을 걸친 것이요, 바리때를 챙기심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용품을 잘 쓰라는 가르침이요. 금륜왕자의 신분으로 손수 음식을 구걸하심은 중생을 교화하여 교만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요, 한 끼니 먹을 만큼만 먹으심은 훗날 비구들로 하여금 재보를 쌓아 두지 못하게 하려 함이요, 차례로 집을 돌면서 구걸하심은 큰 자비는 평등이라 부잣집 가난한 집을 선택 아니하심이요, 본디 자리로 돌아오심은 무슨 일이든지 제자리를 찾아서 하라는 가르침이요, 옷과 바리때를 거두심은 다 슨 물건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모시하는 가르침이요, 발을 닦으심은 신업(몸으로 지은 업)을 모두 닦아 냄이요, 자리를 펴고 앉으심은 모든 것이 공空임을 그렇게 보이신 것이다.
p25
2
마음! 분명 나한테서 나오는 것인데 내 맘대로 안 된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어떻게 하면 마음의 부림을 당하지 않고 마음을 부리며 살 것인가? 이 마음을 어떻게 써야 마침내 부처의 땅에 들어갈 것인가? <금강경>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석가의 대답이 되겠다.
p29
3
마음을 어디에 머물 것인지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오직 네 마음을 무릎 꿇릴 길만 찾아라. 이것을 이루면 저것이 이루어진다. ...
부처되는 길 어렵지 않네
오직 가려서 고르는 짓만 하지 말게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만 그만둔다면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리니
p34
나 라고 부르는 물건이 없는 사람, 그가 보살이다. 나라는 환幻에서 깨어난 사람, 더 이상 '나'라는 허깨비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라마나 마하리쉬)...인상이 있는 자는 주主와 객客을 나누고 스스로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여,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었다 하고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았다 하고 계戒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파계한 자들을 업신여긴다. 중생상을 지닌 자는 진실로 구하고 희망하는 마음이 자기한테 있다고 말하면서 말은 바르게 하나 행동은 그릇되고 입은 착하나 마음은 악하다. 수자상을 지닌 자는 깨우쳤을 때는 깨달은 것 같은데 경계가 드러나면 감정이 일어나고 여러상에 집착하여 복리福利를 희구한다. ...어두우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인 것이다. 어두운 사람이 재물과 학문과 가문을 뽑내며 다른 모든 사람을 깔보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을 행하나 자기는 높은 뜻을 지녔다고 스스로 우쭐거리고 널리 모든 사람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내가 인의예지신을 알고 행한다고 말하면서 남을 공경하지 아니함을 인상이라하고, 좋은 일은 자기한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중생상이라 하고, 경계를 대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이라 하니, 이는 이른바 보통 사람의 네가지 상相이요,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또한 네 가지 상이 있으니 마음에 주와 객이 따로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계지티는 것으 ㄹ스스로 자랑스레 여겨 파계한 자 가벼이 여김을 인상이라 하고, 삼악도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제천에 나고자 소원하는 것이 중생상이요, 마음으로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여 복업을 부지런히 닦고 여러 집착을 잊지 못함이 수자상이니, 이 네가지 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없으면 곧 부처인 것이다.(육조)
모든 것이 아상에서 나온다. 아상 하나 없으면 다른 모든 상도 없다...
건너간다느니 얻는다느니 하는 말에 속아서 자꾸만 헛갈리는 것이다. 저 건너 언덕도, 바다도, 그 위를 건너는 나도, 모두가 진여眞如의 출현일 따름이다. 눈 한번 번쩍 뜨면 그만이라고 번뇌도 망상도 습기도 그것으로 고통받는 나도 더 이상 없다고 그렇게들 말씀하신다.
4
p39
여섯 문이 막혀 있으면 죽은 것이다...
삼체개공이라,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주고받는 물건도 모두가 공이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 공이다. 남는 것은 다만 베풂이라는 행이 있을 따름이다.
p42
물은 흐르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기가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여워하거나 다투지를 않는다. 보살은 그와 같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모든것에 모든 것을 베풀지만 자기가 그러고 있는 줄을 모르는지라 결과에 초연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헤아릴 수 있겠지만 그것들을 반짝이게 하는 허공은 헤아릴 수 없다. 보시를 베푸는 보살의 복덕이 그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5
p47
불살을 부처님으로 보면, 부처님을 보여 주려고 있는 물건이 오히려 그를 가리고 만다.
p49
허虛는 차 있지 아니함이요, 망妄은 참되지 아니함이다. 아무리 단단한 사물이라 해도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확률로서만 소재를 말할 수 있는 소립자들의 부단한 움직임일 뿐이다. 있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 없고 없다고 말하는 순간 벌써 거기에 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상相이다...나는 남자다 이보다는 나는 사람이다가 더욱 여래를 보는 눈에 가깝다 나는 사람이다 이보다는 나는 생물이다가 더욱 여래를 보는 눈에 가깝다. 나는 생물이다 이보다는 나는 일물이다가 더욱 여래를 보는 눈에 가깝다....
인생은 등산이다 오를수록 입지는 좁아지고 시야는 넓어진다. 비상非相인 실상을 향한 걸음이 아닌진대 밥 먹고 똥 싸고 가르치고 배우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헛장난이란 말인가?
6
p53
이제 수행의 공덕이 결실을 맺을 때가 되면, 그 때가 아무리 말법시대라 하더라도 상관없이 경한 구절을 듣고 곧장 한생각(일념)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깨끗한 믿음을 내게 된다.
"한생각에 이르러 깨끗한 믿음을 낸다는 말은 범부가 세상 한복판에서 일체이 선과악, 범凡과 성聖을 같이 보는 눈을 뜬다는 말이다. 어떤 것은 잡고 어떤 것은 버리는 마음을 품고 끝없이 헛된 생각을 심으면 깨끗한 믿음을 낼 수 없다"....
무엇을 일컬어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계신 곳에 한 마음으로 공양하고, 교법에 잘 따르고, 여러 보살과 선지식과 스승 스님과 부모와 노인과 덕이 높으신 분들이 계신 곳에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고 덕이 높으신 분들이 계신 곳에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하고, 내려받은 교명을 받들어 그 뜻을 어기지 않는 것이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가난하여 고생하는 중생을 대하여 자비심을 품고 업신여기거나 싫어하는 일 없이 그들이 얻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힘껏 베풀어 주는 것이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악한 무리에 대하여 스스로 부드럽게 어울려 주고 오래 참아 주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뜻에 거역하지 아니하여 저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어 사나운 마음을 그치게끔 하는 것이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육도중생을 대하여 죽이지도 해하지도 않고, 속이지도 천대하지도 않고, 헐지도 욕하지도 않고, 타지도 때리지도 않고, 그 고기를 먹지 않고, 언제나 이익되게 행하는 것이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
신심이라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 일체 번뇌를 능히 없앨 수 있음을 믿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이 모든 출세공덕을 능히 성취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요, 바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을 능히 나게 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을 능히 나게 할 수있음을 믿는 것이요, 자기 몸의 불성이 본래청정하여 조금도 때가 묻지 않았고 다른 모든 불성과 더불어 평등무이함을 믿는 것이요, 육도중생이 본디부터 상이 없음을 믿는 것이요, 모든 중생이 마침내 성불할 것을 믿는 것이니, 이를 두고 깨끗한 신심이라하였다.
8
p66
마음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으면 곧 복덕성이 아닌 것이요, 주는 마음 받는 마음이 없으면 이를 복덕성이라 한다.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기대고 행동이 부처님의 행실과 같으면 이를 이름하여 복덕성이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부처님의 행실을 좇아 밟지 않으면 곧 복덕성이 아닌 것이다.(육조)...
부처님한테는 '남'이 없다. 그러니 무엇을 베풀 때 주는 '나'가 어디 있고 받는 '너'가 어디 있겠는가?
p70
이는 모든 문자와 글귀가 표지나 손가락과 같다는 말씀이다. 표지나 손가락은 곧 그림자나 메아리를 뜻한다. 표지를 의지해서 사물을 취하고 손가락을 의지해서 달을 보는데 달은 손가락이 아니요 표지는 물건이 아니다. 다만 경經을 의지하여 법을 취하거니와 경은 법이 아니니, 경문은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법은 혜안으로만 볼 수 있다. 혜안을 뜨지 못한자는 경만보고 법은 보지 못한다. 법을 보지 못하면 부처님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육조)
9
p72
모든 개울이 강에 이어지고 강은 또한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므로 개울과 바다는 둘이 아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기 시작한 물은 결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입류한 사람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의 몸으로 환생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울은 아직 바다가 아니다. 이점을 놓치고 보니, 보살도 못 된 것이 부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꼴불견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p79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자 명상하지 않는다. 깨달음이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목적도 목표도 없다. 어떤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루고 싶은 것을 이미 이루었음을 본다. 그리하여 애쓰기를 멈추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을 보거나 빗소리를 들으면서 평안하다. 무엇을 좇아서 달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매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거기에 있다.(틱낫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을 얻은 자의 경지를 말한것이다. 아라한만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직 가지지 못한 자는 가져야겠다고 말하고, 이미 가진 자는 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깨달음이란 없는 눈을 누군가로부터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눈을 제가 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침내 사람으로 되었다. 사람이 된 것인가 아닌가?
10
p84
백락천이 관선사에서 묻기를 닦은 바도 없고 깨달은 바도 없다면 범부와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선사계서 대답하셨다. 범부는 어리석어서 이승에 집착하거니와 이 두가지 병(어리석음과 집착)을 여의면 그것을 이름하여 참된 닦음이라 합니다. 참되게 닦는 사람은 애쓰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니,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게으르면 어리석음에 떨어집니다. 마음을 어떠헥 쓰느냐가 열쇠지요. 이는 초학입도의 법문입니다. 법을 얻은 바 없다는 말씀은 수보리가 여래의 자성이 본디 맑고 깨끗하여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무 얻은 법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삶에 두가지 차원이 있다. 우리는 그 두가지 차원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물결과 같아.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차원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하나는 물과 같다. 그것을 우리는 궁극적 차원 또는 열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물결을 경험한다. 그러나 물을 경험하는 법을 발견할 때 우리는 명상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열매를 얻게 된다.
p90
모든 수행인은 마땅히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할 수 있고 나는 안다고 하면서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을 마음으로 가벼이 여기면 이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아니다. 자성에 언제나 지혜를 내고 평등한 사랑을 행하고 마음을 아래로 내려 일체 중생을 공경하면 이것이 곧 수행인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다. 만약 자기 마음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자리를 애착하여 그 마음이 머무는 곳이 있으면 이것이 곧 법상에 붙잡히는 것이다. 모양을 보고 모양을 집착하여 모양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면 그가 곧 헤매는 사람이요 모양을 보고 모양을 떠나 모양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이 하늘을 가린 것과 같고, 모양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하늘에 구름이 없어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모양에 머물러 마음을 내면 그것이 곧 망념이요 모양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면 그것이 참된 지혜니, 망념이 일어나면 어둡고 참지혜가 비추면 밝다. 밝으면 번뇌가 일지 않고 어두우면 츅진이 다투어일어난다.
p93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몸은 크기가 없다. 모든 것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을 무엇에 견주어 크다 또는 작다고 말할 것인가?
11
p97
<화엄경>에 이르기를, 캄캄한 어둠속에 있는 보물은 등이 없으면 볼 수 없듯이 부처님의 법을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으면 지혜가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경을 설해 주는 공보다 더 큰 공이 무엇이겠는가?
바다에 들어가 모래알을 세는 것은
쓸데없는 힘의 낭비다.
구구하게 티끌만 뒤집어쓸따름
집 안에 있는 보물을 꺼내어
늙은 나무에 꽃을 피우고
봄날을 즐기는 것만 하겠느냐?
12
p100
능히 경을 받아 모신다 함은 그대로 좇아서 산다는 뜻이다. 경은 책이지만 책이 아니다. 길이다. 아무리 읽어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경을 모신 사람이 아니다. ..
있는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 이 경을 설하되 언제나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이 없이 하면 곧 그 사람 몸 속에 여래의 전신사리가 있으니 그래서 부처님 탑묘와 같다고 말했다.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경을 설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헛되이 헤매는 마음을 버리고 깨달아 본디 불성을 얻어서 언제나 진실하게 하면,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가 모두 감복하여 그를 공양할 것이다. 자기 마음으로 이 경을 송득하고 자기 마음으로 경이 뜻을 해득하고 자기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모양을 지니지 않는 이치를 체득한다.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부처님의 행을 닦으니 곧 자기 마음이 부처다 그래서 그 있는 자리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한 것이다.(육조)...주먹으로 손바닥을 만들고 손바닥으로 주먹을 만드는 것과 같다.
p114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에서 그것을 구한다면 만겁을 두고 경을 읽어도 끄내 얻지 못하리라...
오랜세월 몸을 내어 주어도 공空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망령된 마음을 없애지 못하지 그가 곧 중생이요 한마음으로 경을 지녀 나와 남이 한꺼번에 없어지면 망령된 생각이 이미 없어졌으니, 말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룬다.
14
p117
진리를 깨달아 가는 길은 깊을수록 넓어진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남을 받아들이는 품이 넓지 못하다면 열심히 굴을 파기는 했으나 중심을 향해 파지 않고 지평을 따라서 팠기 때문이다. 그런 굴은 두더지 굴이지 진리를 캐는 굴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중심에 있다. 중심을 향하년 길은 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길이 없다.
깊이 들어갈수록 남을 받아들이는 품이 넓어진다는 애기는 그남큼 '나'가 무너지면서 '남'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나와 너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것이 없었음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드디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그 뜻을 깊이 깨닫는다. 그 결과 슬픈 눈물이 흐른다. 그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법에 공명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p118
믿는 마음이 깨끗하고 맑다! 아무 꿍꿍이속 없이 무슨 티끌 같은 욕심도 없이, 기대하는 마음도 없니 그냥 믿는다
믿는 다는 말을 상대에게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긴다는 밀이다. 그의 말을 곧이듣고 그대로 응하는 것이다. 나를 상대에게 흡수 통일시켰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의 나는 없다. ...
천당 가려고, 사람 되려고, 깨끗해지려고..예수 믿고 하느님 믿고 성경 믿고 부처님 믿는 것은 아직 멀었다. 그런 마음(...하려는...되려는)이 모두 없어져야 비로소 믿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인 이 아무개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거기 무슨 목적이, 의도가 따로 섞일 일인가?
p129
내가 화를 내는 까닭은 내가 다칠까봐 두려워서다. '나'가 단단할수록 화를 잘 낸다.
"나에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병을 앓겠는가?"(노자)
암이나 결핵이 병이 아니다. 독립된 나가 따로 있다는 미숙한 의식이 병이다.
p133
어리석은 자는 일을 없애고 마음을 없애기 않는다. 슬기로운 자는 마음을 없애고 일을 없애지 않는다.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니 복덕을 짓겠다는 마음조차 없다.
p137
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알참은 허하지 않은 것이고, 같음은 이치에 맞는 것이고, 속이지 않음은 헛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르지 않음은 처음부터 나중까지 한결같은 것이다. 성인의 마음은 틀림이 없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대로 수행할 일이다.
속에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 말이다. 그말이 속생각과 느낌에 일치되면 참말이다. 일치되지 않으면 속이는 말이요 다른 말이다.
p138
진공묘유인데, 진공에서 묘유가 나오는 게 아니라 진공이 묘유요 묘유가 진공이라는 말이다. 사람입이 두개라면 동시에 한 입으로 진공을 말하고 다른 입으로 묘유를 말할 수 있을 터이나 입이 한 개라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p139
사람 눈을 뜨게 해 준다면서 법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에 얽매여 있으면, 그것은 본인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것이므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다 둘아 어둠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을 해방시키겠다는 자여. 그대는 과연 해방되었는가?
빛이 저를 먼저 드러내지 않고서 다른 것들을 드러낼 수는 없는법.
p140
내가 경을 읽는 것은 경이 나를 읽는 것이다. 경은 부처님 말씀이다. 내가 경을 읽으면 부처님이 나를 읽는다. 불경이든 성경이든 경을 읽으면서 본인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면 경을 헛 읽은 것이다.
자기의 실상을 읽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
p143
그렇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하지 않아도 될, 하지 말아야 될 수많은 일에 쓸데없이 분주하여 한 가지 필요한 일을 놓치고 마는 중생이 있어서 오늘도 <금강경>은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 다만 그 필요한 한 가지가 만사 젖혀 두고 경이나 외면서 눈뜬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 무릎 위에 성경을 펼쳐 놓고 그 말씀을 옆사람에게 해설해 주느라고 바로 자기 앞에 비틀거리며 서 있는 노인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는 여자를 전철에서 보았다. 그토록 민망한 꼬라지라니!
p149
만약에 수행을 하고자 할진대는 마땅히 정법에 의할 일이다. 마음이 생각을 여의고 허공과 같아져서 성범에 떨어지지 않고 몸과 마음이 평등하도록 이화 같이 수행하는 것이 곧 정법이다.
p157
공덕은 법신에 있지 수복에 있는게 아니라 하셨고, 또 이르시기를 공덕은 자성에 있는 것으로서 보시와 공양으로 구할 바가 아니니 그래서 복으로는 공덕에 미치지 못하고 부처님 공양함이 경을 모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셨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테오 16:26)
p158
자기 몸이 경험하는 세계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는 그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 몸을 가지고서 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p159
나는 내 몸을 돌고 있는 피에 대하여, 그 발생 과정과 성분과 소멸 과정에 대하여 아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피가 소중하다는 사실, 그것이 없다면 몸도 없다는 사실은 내 머리도 알고 몸도 안다.
이렇게 사람은 불성에 대하여, 하느님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 하여금 몸을 훼방 놓지 못하도록 잡도리를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17
p170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왔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저 빛과 같다. 빛은 인간의 감각으로 미칠 수 없는 실체다.
p175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본디 없거늘 어찌 중생을 깨우치는 자가 있겠는가?
p179
내가 없다는 말은 전체에서 분리된 독자적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서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인데 어디에 독립된 실체가 있겠는가?
이 진실을 깨쳐 통달한 사람,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보살이다.
18
p181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 아무막힘이 없어서 '하나'를 이룬다는 얘기다. 내가 저 돌맹이를 보는 순간 돌과 나는 서로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내가 돌을 보는 동안 돌도 나를 본다. 눈이 맑다는 말은 눈에 아무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말이다. 맑은 눈이 곧 밝은 눈이다. ..
뒤를 보려면 돌아가거나 돌리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천안은 앞뒤 위 아래를 함께 본다. 사람이 천안을 얻으면 만물을 공평무사로 보게 될 것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를 없앤다는 말은 내가 꽃을 볼 때 나도 없고 꽃도 없다는 말이다. 다만 봄이라는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부처의 눈을 얻으면 모든 것에서 부처만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천하에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요한 9:39)
p187
마음이란 인연에 따라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 마음이라는 체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이름이 있을 따름이다.
p192
깨달은 자에게는 죄가 없다 그것을 지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에게도 죄는 없다. 다만 그 흔적과 죄책감이 있을 뿐이다. ...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 말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더러움이라고 하는가? 생사조작취향이 있어서 그것들이 더러움이다. 곧장 도를 깨닫고자 한다면, 평사심이 곧 도다. 무엇이 평상심인가? 만들어 내지 않고 옳고 그르고가 없고 잡고 버리고가 없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가 없고 범인과 성인이 없음이다. 그래서 경에 이르시기를 범부행도 아니고 성형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고 했다.
20
p199
무릇 업식을 가진 자들은 종종 유에 사로잡혀 여러가지 망상을 일으키는데, 이를 이름하여 거꾸로 뒤집힌 지견이라고 한다. 또한 그들은 종종 공에 떨어져 도무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잘라지고 없어진 지견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선근을 지녀 온 사람만이 전도와 단멸의 두 가지 병에 걸리지 않아 공의 제 뜻을 밝히 알 수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바르고 참된 지견이라고 한다. 만약에 이 이치를 깨달아 때를 좇아서 옷 입고 밥먹고 거룩한 태를 잘 기르며 운에 맡겨 시절을 보내면 그 밖에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
21
p200
지상에서 인간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가 있을 뿐이다...."...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아니다'
마음이 이미 깨끗하고 맑으니 말과 침묵이 다 같은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흩어지면 곧 고요해질 뿐...
<금강경> 전체가 끊임없는 우상 부수기다. 생각도 굳어지면 얼마든지 우상이다.
p202
미래에 무엇이 어찌 될 것인지를 묻는 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에게는 미래라고 하는 것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은 깨달음의 길에 다만 방해가 될 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질문 자체를 못들은 것으로 치고 제자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린다. 부답으로 정답을 내리신 것이다....
부정되어야 할 것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다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하는 체에 대한 단언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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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7
인생이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인간뿐 아니라 만유가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있다. 돌아감이 길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노자 40장). 자기를 끝까지 텅 비우고 착실하게 고요함을 지키면 만물이 더불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돌아감을 나는 본다. 만물이 이 모양 저모양으로 많고 많으나 저마다 뿌리로 돌아간다(노자 16장)...
안으로 몸과 마음이 공임을 깨닫고 밖으로 만사가 공임을 깨달아 모든 상을 깨뜨리고 나면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되고 다투지 않게 되니 이를 일컬어 선열(선정에 든기쁨)이라 한다. 이른바 크게 깨우친 사람이 추호의 장애도 허용하지 않고 미진도 몸에 묻지 못하게 하여 오래도록 변함이 없으면 그가 곧 위없는 선비요 흔들리지 앟는 존자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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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9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속에 진성을 지니고 있음은 동일하다. 그래서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였다. 색신에게는 고하가 있고 진성에는 고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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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3
아무리 큰 수라 해도 0보다 클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수도 0보다 작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에서 수를 통하여 0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이른바 수행의 요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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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5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은 허언인가? 그렇지 않다. 아침에 동산으로 해가 뜬다는 말이 참말인 그만큼,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 한다는 말도 참말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진다고 말하지만 실은 아침이나 저녁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요. 더욱이 해는 뜨고 지고 하는 물건이 아니다. 요컨대 해가 뜬다고 말하고 나서 그런데 해는 뜨지 않는다고 말하라는 얘기다.
p217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사이에 배는 강을 건너고 우리는 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말에 얽매이지 말고 말을 타야한다.
p227
보살은 본디 복덕을 쌓으려고 중생을 제도하는 게 아니다. 그 복덕이 저절로 따를 뿐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대낮에 길을 가는데 일부러 그림자를 만들고자 하지 않아도 그림자가 그를 따라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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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0
부분은 움직이고 전체는 가만히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분이면서 전체이기 때문이다.
p235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은 부분이 전체를 얻겠다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은 열매가 나무를 보겠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나의 눈길이 붙잡혀 있는 한, 나는 전체를 뵙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