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_막스 베버

여행길 2011. 11. 12. 09:41

 

 

막스 베버 지음 / 김덕영 옮김 /  도서출판 길 / 2010

 

 

p29

사람들이 큰 바다나 높은 산맥을 바라볼 때 그리하듯이, 자신의 하찮은 개인적인 소견은 혼자 간직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예술적 구성이나 예언자적 사명의 소명을 받고 그에 대한 능력이 주어진 것을 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 밖의 대부분의 경우에 '직관'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객체에 대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함을 은폐하는 것에 다름 아닌데,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함과 동일하게 비판 받아야 한다.

 

p37

클라게는는 인간의 의식을 몇 가지 구성 요소로 나눈구 그것들을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관찰하고 분석하며 기술하는 실험심리학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성격을 그 무엇으로도 분해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전체적인 것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영혼은 두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와 외면 세계가 만나서 형성되는 형식에 있으며, 따라서 성격학은 타자 성찰과 자아 성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p58

노동의 정신, 진보의 정신 또는 그 밖에 어떻게 불리든 간에,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불어일으킨 것으로 보는 그 정신은 오늘날 흔히 그리하듯이 세속적 쾌락이나 그 어떠한 계몽주의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p83

인간은 본성상 더욱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기를 그리하여 그에 필요한 만큼만 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인간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작업을 시작한 모든 곳에서 전 자본주의적 경제 노동의 그러한 기본 동기에 의해 굉장히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높은 임금을 통해 영리욕에 호소하는 방식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반대의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자명한 귀결이었다. 즉 임음을 인하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지금까지의 수입을 유지하려면 이전보다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것이 그 수단이었다...저임금이 생산적이라는 생각 즉 저임금이 노동 성과를 높인 다는 생각이 수백년 동안 자본주의의 신조로 통용되어왔다...대중은 오직 빈곤하기 때문에 그리고 빈곤한 한에서만 노동한다는 생각이 바로 자본주의의 신조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p87

성과급 인상도 습관의 장벽에 부딪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반향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특별히 종교적 교육을 받은 처녀들, 그중에서도 특히 경건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처녀들만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생각을 집중하는 능력과 노동을 의무로 여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태도가 이들에게서는 빈번하게 수입과 그 크기를 반드시 계산하는 엄격한 경제성, 그리고 작업 능력을 상당히 제고하는 냉철한 자기통제 및 절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노동을 자기 목적, 즉 소명으로 파악하는 태도가 화긻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토대는 바로 이들에게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전통주의적 구습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는 다름 아닌 종교적 교육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p94

이념적인 자본주의 사업가는 허식과 불필요한 낭비 및 고의적인 권력 행사를 꺼리며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한다...특히 그에게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토록 재치 있게 권고한 신중함보다 훨씬 더 솔직할 정도로 냉정한 겸손함이 결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아니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부를 자기 개인을 위해서는 조금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오직 훌륭한 소명완수라는 비합지적 의식을 위해 사용할 뿐이다.

 

p98

외면적으로는 순전히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개인들이 의무적인 것으로 느끼는 소명이라는 범주에 편입하는 것은 어떠한 관념의 세계에서 기인한 것일까?이렇게 묻는 이유는 이 관념이야말로 새로운 유형의 기업가의 생활양식에 윤리적 토대와 지지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특히 좀바르트가 그의 왕왕 유효적절한 연구에서-경제적 합리주의는 근대경제 일반의 기본동기라고 불러왔다. 이 말이 생산과정을 과학적 관점 아래에서 조직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유기적 한계에서 해방시켜 노동생산성을 증대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말은 지당한 것이다...엄밀한 회계적 계산의 토대위에서 합리화되었으며 또한 계획적이고 냉철하게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경제의 근본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임이 자명한데, 이 특성은 농부의 하루벌어 하루 먹는 삶, 옛 길드 수공업자의 특권적인관행 정치적 기회와 비합리적 투기를 지향하는 모험가 자본주의등과 대조를 이룬다.

 

p130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실천적 삶과 종교적 출발점의 연관성을 루터주의보다 쉽게 구명할 수 있는 트로테스탄티즘의 형태들을 고찰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p137

즉 종교개혁가들-우리의 고찰을 위해서 메노, 조지 폭스, 웨슬리 같은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기켜야 한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찍이 윤리적 개혁 강령을 중심적인 관점으로 삼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윤리적 문화 단체의 창설자도 아니었으며 인도주의적 사회개혁운동이나 문화 이상의 대표자도 아니었다. 그들의 윤리적 목표와 그들의 교리의 실천적 영향은 모두 여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순수한 종교적 동기의 귀결일 뿐이다. .. 즉 종교개혁의 문화적 영향은 상당 부분-더욱이 우리의 특별한 관점을 위해서는 아마도 주로-종교개혁가들의 활동의 예상치 못했던 혹은 심지어 원치 않았던 결과였으며, 때로는 그들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동떨어졌거나 심지어 대립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p149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가톨릭이 세속적 도덕을 넘어서는 것은 무용하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는 그의 직업에 따라서"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발전과정과 바야흐로 1530년대 초에 각 개인이 위치한 질서의 신성함에 대한 평가가 본질적으로 강화된 점, 이 두가지 사실이 루터의 성서 번역에 뚜렷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후자는 삶의 사소한 부분에도 매우 특별한 신의 섭리가 내재한다는 그의 신앙이 점점 예리하게 구체화된 결과지잊만, 동시에 세속적 질서를 신이 영원불변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그의 의향이 강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p154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는 우선 (1) 인간의 두가지 본성을 사용해 자연법적 의미에서의 세속적 의무를 구성한다. 두 가지 본성은 인간이 사실상 자신의 육체와 사회적 공동체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2)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이는 첫번째와 결부된 두번째 근거이다.-만약 그가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순수한 사랑에서 베풀어진 신의 은총에 대해 이웃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처럼 신앙과 사랑이 아주 느슨하게 결합되는 지금에서 (3) 노동은 정신적인 인간에게 육체에 대한 지배력을 부여하는 수단이라는 옛 금욕주의가 논리적 근거를 얻는다.

 

p155

허영심은 인간의 가슴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잡역부, 주방 심부름꾼, 짐꾼조차 뽐내며 자신의 예찬자를 얻으려한다(브레즈 파스칼, 팡세)

 

p161

또한 이는 결코 작은 유혹이 아니다. 즉 자신의 소명에 뜻을 두고 다른 종류의 소명에 부러움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p167

Philipp Jakob Spener 1635-1795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서와 설교를 존중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리에서 실천적인 삶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 중심이 옮겨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p181

예컨대 저주받은 자가 자신의 운명이 부당하다고 탄식한다면 그것은 마치 짐승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불평하는 것과 흡사하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메울 수 없는  심연에 의해 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신이 그 위엄의 찬미를 위해 다른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신앞에서 오직 영원한 죽음만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비장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인간적인 교리는 그 장엄한 논리적 일관성에 몸을 내맡긴 한 세대이 정서에 대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즉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내적 고립은 다른 한편으로 청교주의적 과거를 지닌 국민들의 국민성과 제도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저 탈환상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생채를 띠는 개인주의의 원천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다.

 

p202

칼뱅주이에서는 가톨릭에서 나타나는 바 죄, 회개, 속죄, 평안 그리고 또다시 죄로 이러지는 참으로 인간적인 기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p203

성 베네딕트는 일반적으로 서방 교회 수도회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성 베네딕트는 6세기 초 로마 근터의 수비아코라는 곳에 12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529년에는 다시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통상 이것이 베네딕트파 수도호의 모母수도원으로 간주된다. 540년경 베네딕트 규칙을 작성했는데 그 핵심은 절대적 복종, 침묵, 정주(한 수도원에 죽을 때까지 머물며 수도하는 사람들의 안간관계를 끝까지 윶하는 것) 겸양 등이 었다. 이 규칙 외에도 베네딕트파 수도회의 생활을 관통하는 원칙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하고 노동하고 독서하라"였다. 그는 수도승의 일과를 아주 명확하게 구조화했다. 베네딕트파 수도승의 일상적 삶은 기도와 침묵 속의 명사, 경건한 독서 그리고 육체농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p205

서방 기독교의 수도승적생활양식은 체계적을  완성된 합리적 생활 양식의 방법이 되었으며, 그 목표는 자연상태를 극복하는 것이었다....그리함으로써 수도승을-객관적으로-신의 왕국에 봉사하는 노동자로 교육시키며 이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주관적으로-그에게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시키는데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자기재배는 성 이그나티우스의 훈련이 추구한 목표이자 최고도이 합리적인 형태로 발전하 수도승적 덕목 일반이 추구한 목표였던 것처럼, 청교주의 실천적 삶이 추구한 최종적인 이상이기도 했다.

 

시토파 수도회가 추구한 이상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은둔자들의 소박한 공동체적 삶이었다. 예배는 단순한 형태로 행해졌고, 수도원과 교회의 건물은 꾸밈이 없었다. 시토파 수도승들은 공동으로 예배를 드릴 때처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침묵의 계율을 지켰다. 이처럼 베네딕트 규율과 그 정신을 되찾으려는 개혁운동으로 출발한 시토파 수도회는 서구의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했다.그러나 이미 12세기 말경에 그 생명력이 고갈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그 한 가지가 바로 경제적인 문제였다. 즉 역설적인 일이지만 자체 노동과 경작의 원칙은 수도원에 거대한 부가 축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와 더불어 수도원은 대지주가 되었으며 수도승들은 더 이상 스스로 노동하고 경작하며 금욕적이고 청빈하게 살지 않고 막대한 토지 소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향유하게 되었다.

 

p217

참회적 회오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얻을 수 있는 루터주의의 상실가능한 은총은 본래 여기에서 우리에게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산물로서 중요한 것, 즉 윤리적 삶 전체의 체계적인 형성에 대해 그 어떤 종류의 동인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루터주의에서최고 수준에 도달한 신자들을 장식했던 저 소박하고 우아하며 특히 정감 넘치는 형태의 신앙은,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도덕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청교주의의 토양에서는 유사한 실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p223

August Hernann Franke 1663-1727 독일 경건주의를 대표하느 신학자 가운데 한명이자 교육자, 찬송가 작사가 필립 야콥 슈페너에서 시작된 경건주이 운동은 그에게서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프랑케에 따르면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영성만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이성(지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믿은음 앎을 통해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영성과 이성(지성)은 인간 교육을 끌고 나가는 수레의 두 바퀴이다. 이는 그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p226

리츨(1822-1919, 독일의 프로테스탄티즘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은 경건주의와 신비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경사적 계시를 강조했으며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신의 나라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데서 기독교의 사명을 찾았다.

 

p227

한걸음 더 나아가 친첸도르프의 독특한 신학적 교리, 즉 종교적 감정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은 그 감정이 진실됨을 나타내는 표지이며, 또한 예를 들어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것은 신의 의지가 계시되는 수단이라는 교리는 생활양식의 합리주의를 강력히 저지했다.

 

p229

선교의 중심체인 형제단은 동시에 사업 경영조직이었으므로 그 구성원들을 세속적 금욕주의의 이끌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어디서나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찾았고 바로 그 관점에서 삶을 냉철하고 계획적으로 형성해나갔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장애가 있었으니, 그것은 신의 예정에 의해 선택된 제자들이 사도들의 전도 생활을 모범 삼아 사도적 무소유의 카리스마를 찬미하는 데서 생겨났다.

 

p243

재세례파가 통상적인 세속적 직업 생활에 흘러들어와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신은 피조물이 침묵할 때만 말씀하신다는 신학적 관념은 신자들로 하여금 냉정하게 행위를 숙고하며 신중하게 검토된 개인적 양심에 따라 행위하도록 공공연히 교육시키게 되었다. 우일의 지세례파 공동체들의 실천적 삶도 역시 이처럼 평화적이고 냉철하며 현저하게 양심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퀘이커교 공동체의 실천적 삶이 아주 특별할 정도로 그랬다. 결국 내적으로 보면 세계의 철저한 탈주술화는 세속적 금욕주의 외에 다른 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p248

이제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수도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북적거리는 시정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 바로 그 세속적인 일상적 삶에 자신의 조직적인 방식을 침윤시키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이 삶을 세속 안에서 합리적인 삶으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p159

"신과의 가장 깊은 교통은 제도나 단체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마음의 비밀 속에 있다"라는 명제와 더불어 에드워드 다우든은 자신의 탁월한 저서 '청교도와 영국국교도:문학연구'에서 이 결정적인 점을 정식화하고 있다.

 

p274

광범위한 사회계층을 사로잡은 모든 종교운동은 "어떻게 나의 구원을 확실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질문은 이니 언급한 대로 비단 이 경우뿐만 아니라 종교의 역사 전체에서, 예컨대 인도의 종교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p276

모든 청교주의 문헌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되풀이해 등장한다. 버니언은 말하기를 "너는 믿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것이 아니라-너는 행위자였는가 아니면 그저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었는가라는 질물을 받을 것이다."가장 온화한 형태의 예정론을 설파한 박스터에 따르면 신앙이란 충심으로 그리고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먼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그러고 나서도 정당한 이유가 있거든 신이 너에게 은총을 거부한 것에 대해 호소하라"

 

p279

괴테의 격언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p281

종교적 체험 자체는 모든 체험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비합리적이다. 그 지고한 신비적 형태에서 종교적 체험을 실로 체험 바로 그것이며, 또한-제임스가 아주 탁월하게 논의한 대로(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절대적인 전달 불가능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즉 종교적 체험은 특정한 성격을 갖고 인식으로 나타나지만, 우리의 언어 장치나 개념 장치의 수단으로는 적합하게 재생될 수 없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적 체험은 그것을 합리적으로 정식화하려고 시도하면 즉시 내용을 상실하며, 이는 개념적 정식화가 진전될 수록 더욱더 그러하다는 사실도 참이다. 바로 여기에 이미 17세기 재세례주의적 분파들에 알려져 있던 모든 합리적 신학의 비극적 갈등의 원인이 있었다.

 

p283

참회한 자는 '하나의 확고한 규칙'을 갖고 그것을 엄격히 준수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삶 전체를 조직하고 변화시킨다. 그는 율법에 따라-현명하고 방심하지 않으며 신중하게-산다. 오직 전인격의 지속적인 변화만이 구원으로 선택된 결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삶을 낳을 수 있다. 실질적인 참회는 언제나 품행에서 표현된다. 그저 도덕적인 것에 불고한 선행과 성령의 역사의 차이는 예컨대...즉, 후자는 거듭난 삶의결과라는 점과 후자에서는 부단한 진보를 감지할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신의 은총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점이다. 구원이란 신의 은총을 통해 인간이 전인격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상 모든 프로테스탄티즘에 공통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최고 이상에서도 똑같이 발견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다름 아닌 철저하게 세속적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청교주의적 신앙집단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또한 특히 언급할 만한 것은, 오직 그 집단들에서만 충분히 강한 심리적 보상을 받았다.

 

p284

스티븐 샤르녹은 자기시험(self-examination)이라는 항목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지식은 합리적 인간의 특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새로운 철학의 제일원리이다."

 

p285

종교개혁은 합리적인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조직적인 생활양식을 수도원에서 끌어내어 세속적인 직업 생활의 영역으로 전파했던 것이다.

 

p291

개혁주의자들의 눈에는 율법이 이상적 규범으로 보인 반면, 루터주의자들에게 율법이란 도달할 수 없는 규범으로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다.

 

p293

멜란히톤은 도덕과 신앙을 접목하기 위한 확고한 지반을 얻기 위해 참회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즉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참회가 신앙에 우선해야 하지만 신앙에는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신앙은-이는 거의 청교도적으로 정식화되었다-참으로 인간을 의롭게 하는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p305

참된 신앙은 감정적으로 지각되기 보다는 그 열매(사랑과 신에 대한 복종)를 통해 인식되는 것이다.

 

p313

맹목적 신앙이란 교회의 진리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믿는 상태를 가리킨다. 달리 암시적 신앙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대되는 신앙이 명시적 신앙인데, 이는 교회의 진리를 자각하고 믿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맹목적 신앙에 대한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태도란 이러한 형태의 신앙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p314

사실 루터주이에서 고해 제도의 존속에서 오는 심리학적 효과는 어니서나 주체가 자신의 품행에 대해 스스로 지는 책임을 경감시키는데 있었으며-바로 그런 효과 때문에 고해를 찾았던 것이다-그로 인해 금욕주의적 요구에서 결과하는 엄격주의를 약화시켰다.

 

p325

속성의 교류는 달리 속성의 교환이라고도 하는데, 루터가 대표적인 이론가이다. 속서이라 함은 신성과 인성을 의미하며, 속성의 교류라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되어 신성이 인성에 전달된다는 교리이다 루터에 따르면 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성과 신성의 연합과 전달이 가능하다. 이에 반해 칼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두 속성이 구별된다고 강조한다.

 

p329

돈 버는 것은 자연적 행위이지 영적 행위가 아니며, 따라서 신의 특별한 부르심 없이도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이 논의는  퀘이커 교도들이 설파하듯이 인간은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면 마찬 가지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와 같의 특별한 동인이 없이는 경작도 할 수 없다는 이론에 대한 답변이다-심지어 오늘날 퀘이커교 종교 회의의 결의문에서도 충분한 재산을 번 다음에는 영리 생활에서 물러나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오직 신의 왕국을 위해 조용히 살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역시 퀘이커교에 독특한 것임은 물론이다.

 

p336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명백히 계시된 신의 의지에 따라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데 이바지 한다. 따라서 시간 낭비야말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가는 그리고 원칙적으로 가장 무서운 죄가 된다.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각자의 소명을 굳게 하기에 너무나도 짧고 소중하다 사교, 쓸모없는 잡담, 사치를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심지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시간이상의 수면에 따른 시간낭비도 절대적인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0337

노동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무엇보다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이다.

바로 여기에서 중세적 태도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사도 바울의 저 명제를 해석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노동이란 단지 개인과 전체의 삶으 ㄹ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이 계명은 오직 인류 전체에게만 해당하지 각 개인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있는 자에게는 이 계명이 무관하며, 또한 그와 동일한 논리에서 인간이 신의 왕국에서 영적으로 활동하는 형태인 명상은 문자적으로 해석되는 그 계명보다 우위에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p341

퀘이커교 윤리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직업 생활은 일관되게 금욕의 덕목을 실행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에게 자신의 직업에 신중하고 조직적으로 종사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양심을 통해 그의 은총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바는 노동 자체가 아니라 합리적 직업노동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한 직업의 유용한 정도와 그에 상응해 신이 기뻐하는 정도는 물론 일차적으로 도덕적 척도에 따라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그 직업에서 생산되는 재화가 전체사회에 가지는 중요한 척도에 따라서 평가되지만, 그에 이어 세 번째로 그리고 자명한 일이지만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점이 대두되는데 , 그것은 다름 아닌 사경제적 이윤성이다.

 

p350

예컨데 복장처럼 인간을 직접적으로 피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 특히 철저했다. 오늘날 생산 표중화에 대한 자본주의의 관심에 의해 촉진되는 생활양식의 저 강력한 획일화 경향응 피조물 신격화 거부에 그 이념적 토대를 갖고 있다.

 

p351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우리는 지금까지 논한 것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금욕주의는 전통주의적 경제윤리의 장애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고, 또 이윤 추구를 합법화했릉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이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질곡을 분쇄해버렸다.

 

p353

금욕적 절양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 바로 그것이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p356

내가 염려하는 바는, 부가 증대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종교의 속 알맹이가 그에 비례해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본질상 참된 신앙의 부층을 그것이 떤 것이든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검약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그에 따라 모든 형태의 자만심과 번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이 증가한다. ..그리하여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 남으나 그 정신은 점차 사라져간다. 이처럼 순수한 종교가 계속해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벌 수 있는 모든 것을 벌고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즉 그럼으로써 부유해지도록 권면해야 한다.

 

p364

괴테는 개인의 주관적, 인격적 유일성의 토대를 둔 세계를 문학적 형식을 빌려 형상화하고 있다. 거기에서 개인이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혼동할 수 없으며 교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괴테는 사회적으로 분화되고 직업적으로 전문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을 문학적 형식을 빌려 형상화하고 있다.

 

p365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어야 한다.

 

p367

니체의 차라투슽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돌보아줄 양치기는 없고 가축 떼만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그 누구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는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기 마련이다.

 

p376

수도에 근접해 있는 것이 덕성을 강화한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적어도 독일의-성직자들에 게 매우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건주이도  그와 유사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슈페너는 종종 한 젊은 동료 성직자에게 다음과 가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도시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비록 대다수는 아주 사악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을 행하는 일단의 착한 영혼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촌락에서는 마을 공동체 전체를 뒤져보아도 진정 선한 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떄가 종종 있음이 걱정스럽다"-농부들은 실제로 금욕적인 합리적 생활양식에 거의 적합지 않다. 그들을 윤리적으로 찬양하게 된 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실 또는 그와 유사한 사실들이 금욕주의의 계급 규정성 문제에 대해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서 논하지 않기로 한다.

 

p380

나태와 태만이 특별히 중죄인 까닭은 그것이 지속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박스터틑 이것들을 노골적으로 은총 상태의 파괴자로 간주한다.

....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렇나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p388

너는 너의 성공과 합법적 이득에 가장 많이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일하면 된다. 너는 너의 모든 달란트를 향상시킬 의무가 있다....

스튜어트 왕조시대, 당국에 의한 빈민 주제와 실업자에 대한 노동 알선 원칙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던 반면, 청교도들의 슬로건은 "보시는 자애가 아니다"였으며, 17세기 말경에는 실업자를 어제하는 체계인 워크하우스가 도입되었다.

 

p389

마테복음에서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의 산물이지만 신은 특별히 그의 백성들을 배려하신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넘어서서 믿는 자들 쪽으로 바뀐다. 이러서 행운은 일반 섭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특별 배려에서 나온다는 논의가 뒤따른다.

 

p392

이스라엘인들이 신의 인간화 일체를 터부시하는 것에 상응하는 규범이 청교주의의 경우에는 피조물의 신격화를 엄금한느 것인데,...달리 말해 냉정한 의무 이행이 감정적인 박애보다 윤리적으로 높게 평가된다.

 

p394

그 특유한 방식으로 항상 새로운 발전 가능성의 맹아를 내포하는 기독교적 은총 사상과 구원 사상이 세상에 대한 개인들의 내면적 태도에 끼친 엄청난 변화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p394

박스터가 보기에 성서의 진리란 궁극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자들과 신앙심이 없는 자들의 놀라운 차이, 새롭게 태어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절대적인 구멸,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신의 명백하고도 아주 특별한 배려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p395

이에 대한 칼뱅의 입장은 최소한 보다 세련된 귀족주의적 형태의 삶의 항략에 관한한 훨씬 더 온건하다성서만이 유일한 제한이다. 성서에 읮하고 양심을 보존하는 자는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향락에 대한 모든 충동을 소심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우리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들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 칼뱅과 청교주의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게 된 데는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불안이 증가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소시민 계층이 전투적 교회의 영역에서 칼뱅주의의 윤리적 발전을 담지하게 되었다는 상황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p395

토마스 애덤스는 거룩한 세자매(기독교의 가르침인 믿음, 소망, 사랑의  은유적 표현, 그러나 그 중 제일은 사랑이니라

 

p399

청교도들에게는 오직 신의 의지냐 아니면 피조물의 허영이냐의 양자택일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부관한 것(아디아포라)란 존재할 수 없었다.

 

p404

박스터는 예수이트들에게서 통용되는 관념과 동일한 근거에서 고행을 거부한다. 즉 육신에는 그것이 필요호 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육신의 노예가 된다.

 

p412

신이-토마스애덤스도 이렇게 생각했다-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빈곤한 상태로 두는 것에 대한 근거는 추측건대 특히 신은 그들이 부에 따르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부가 인간에게서 종교를 빼앗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p413

중세의 수공업자들에 대한 논의는 흔히 그들이 자신이 창작한 것에 대해 기쁨을 가졌다는 가정아래 이루어지는데, 사실 이 기쁨이 심리학적 동인으로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읫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에는 그런 기쁨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분명한 것은 금욕주의가 비로소 노동으로부터 이러한-오늘날 자본주의에 의해 영원히 근절된-현세적인 매력을 박탈하여 그것을 내세로 지향시켰다는 점이다. 직업노동 자체는 신이 원한 것이었다. 오늘날 노동의 비인격성, 즉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볼 대 거의 기쁨을 주지 못하고 무의미하 노동도 당시에는 여전히 종교적으로 신성시되었다. 자본주의는 그 형성기에 양심을 위해 경제적 착취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확고한 토애 뒤에 서 있으며, 또한 그런고로 내세적인 보상 없이도 노동자들의 노동 의욕을 강제할 수 있다.

 

p428

사실 교회란 종교적 구원재를 신탁유증 재단처럼 관리하고 거기에 소속되는 것이(이념상!) 의무적이며, 따라서 무엇으로도 거기에 소속된 사람의 자질을 입증할 수 없는 은총기관이다. 이에 반해 분파란 전적으로(이념상) 종교적 윤리적 자질을 갖춘 사람들의 자발적 결사체이다. 분파라는 결사체가 자유의지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확증에 근거해 그를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면, 개인 역시 자유의지에 따라 거기에 들어간다....그러한 결사체는 거의 언제나 일종의 장례보험으로 기능했으며, 그 밖에도  매웅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빈번히 그리고 특히 현대적 해체 과정에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결사체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자기의 과실 없이 경제적 위기에 직면할 경우 그는 재력 있는 형제들 모두에게 자기 자신을 형제애 정신으로 구난해달라는 (윤리적인)요구를 했다.

 

p433

니체의 도덕철학에 입각해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주의와 금욕주의는 단지 허무에 대한 의지가 종교적으로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확산된 합리주의적 금욕주의적 가치와 이상은 오로지 인간의 왜소화와 자기부정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에는 비인격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부합해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허약하고 왜소한 인간들의 상호 의존과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저급한 인간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군집형성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군집도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회집단일 뿐이다.

이에 반해 베버는 종교개혁 이후 시기인 16-18세기를 자본주의의 영웅적 시대로 간주한다. 아니 니체 자신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이 시기는 시민계층적 주인도덕의 시대 또느 영웅적 초인의 시대였던 것이다. 일찍이 고대 유대교에서 출발한 장기간의 탈주술화 과정은 바로 종교개혁 이후의 문화 시기에 이르러,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에 이르러 종결되는데, 그 결과로 시민계층의 개인들은 전통적인-종교적, 정치적, 사회적-결속과 수속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 주관적인 의미와 가치에 입각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영위할 수 있는 인격체로 발전해갔다. 이와 더불어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ㅌ들의 종교 공동체는 주관적, 개인적 인격체인 다수의 개인들이 공통된 행위 유형과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사회집단이다.

 

p436

오늘날 그런 종류의 수많은 클럽들이 적나라한 금권정치와 더불어 그리고-이는 명백히 관찰할 수 있느 현상이다-부분적으로는 그것과 대립해 현재 미국의 발전을 특징짓는 저 신분적 귀족화 경향의 담지자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모래더미처럼 무정형적으로 모인 사회가 아니라 엄격히 배타적이지만 자발적인 결사체들이 서로 엉켜 있는 사회라는 점이야말로 바로 특별히 미국적인 민주주의의 표징이었다.

 

p447

어떤 경우에도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고용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명예직으로 혹은 회중이 주빈에게 자발적으로 주는 선물을 받고 혹은 부업으로 실비만 받고 봉사했다. 아니면 성직자는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거나 순회 설교자들이 동일한 순회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일종의 선교 조직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는 감리교에서 그랬다

 

p450

실상 모든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동류인 집단 내에서 사회적으로 자기 주장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의 특정한 자질을 배양하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p455

미국이야말로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일요학교 등과 같은 이웃과의 교제가 필수 불가결이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필수 불가결한 것은 윤리적으로 신뢰할 만한 이웃들과의 교제라는 것이다.

 

p460

17세기에 이것이 완전히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버니언은 '돈 사랑 씨'로 하여금 부유해지기 위해, 특히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신앙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주장토록 했다. 왜내하면 어떤 이유로 신앙을 갖게 되었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p473

콜레지안트파는 모든 교회가 사도 교회의 원리와 실천을 저버렸기 때문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확신하면서, 복음주의적 갱신을 주장했다. 그 구성원들은 교회 건물도 목사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바교회적이고 순수한 평신도 운동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콜레지안트파는 교의적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신앙집단이었다.

 

p531

칼뱅주의와 그중에서 직업윤리를 가장 일관된 논리로 정초한 청교주의의 독특성 그리고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과 발전에 끼친 영향을 보다 명백히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칼밴주의와 청교주의가 다른 사상적 조류나 실천적 운동과 어떠헥 다르며 칼뱅주의와 청교주의가 근대 세계에 대해 지니는 문화의의가 다른 사상적 조류나 실천적 운동과 어떻게 다른가에 비교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p533

베버가 특정한 개념을 축으로 수많은 언어를-어찌 보면 집요하리만치-비교하는 목적은 직업, 소명이라는 독일어 단어가 종교개혁의 산물, 즈그 마르틴 루터의 성서 번역의 산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적 민족에게만 그러한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데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고전적 고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가톨릭적인 민족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확고한 사회적 지위 또는 특정된 노동역이라는 의메에서의)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색체의 표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는 해당 언어의 어떠한 인종적 특성, 예컨대 게르만 민족정신 같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했음이 드러난다. 루터의 번역에서는 시락서의 한 구절에서 최초로 완전히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그러자 이 단어는 곧바로 모든 프로테스탄트적 민족의 세속언어에서 오늘날의 의미를 갖게되었다. 반만 그 전에는 세속 문헌에서 그와 같은 어의에 대한 어떤 단초를 찾아볼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적 민족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또한 설교 문헌에서도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루터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잘 알려진 한 독일 신부주의자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베버가 목적하는 바는 오히려 밀턴의 작품에 표현된 청교주의의 진지한 세계 지향성 즉 세속적 삶을 임무로 평가하는 태도가 내세 지향적인 중세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표현은 루터주의자들의 찬송가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을 입증하려 했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려면 루터와 루터주의-그리고 중세 가콜릭 신학사상-가 아니라 칼뱅과 칼뱅주의 그리고 청교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제일 먼저 직업이라는 개념을 주조한 인물이 바로 루터...그러나 그의 직업 개념은 여전히 전통주의적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근대성을 획득하는 것은 칼뱅과 칼뱅주의 그리고 다른 청교주의에서였던 것이다.

 

p540

먼저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행우에 의해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창조하는데, 이는 괴테가 "잠언과 성찰"에서 한 다음과 같은 격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관찰을 통해서는 결코 안 되고, 행위를 통해서나 가능하다. 네 의무를 이행하도록 애써라, 그러면 너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그런데 너의 의무는 무엇인가? 일상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베버는 계속해서 이렇게 주장한다-칼뱅주의는 다른 어떤 신앙 형태보다 사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이 역시 수동적인 관조가 아니라 적극적이 행위에 칼뱅주의 윤리의 핵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괴테의 명제가 적용되었다. "행위하는 자는 언제나 비양심적이다. 양심을 가진 자는 관망한느 자뿐이다" 결국 베버는 칼뱅주의의 행위윤리와 괴테의 행위윤리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인의 인격 및 근대의 문화와 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대한 베버의 논리 전개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즉 베저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마지막 부분에 행위를 체념과 결합하고 있다. 체념이란 개인의 삶을 전문적 직업노동에 한정하며 다방면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인간성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행위와 체념은 근대인의 특성이자 숙명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p542

그밖에도 베버는 1917년의 강연 '직업으로서의 과학'에서 괴테의 삶 자체가  시민계층적 생활양식에 특유한 행위와 체념의 결합을 구현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 위대한 예술가는 낭만주의자들과 달리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주조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p564

그러나 베버가 진정으로 내세우고 입증하려는 테제는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기계적 '일대일' 인과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다양한 구성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는 다시금 이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인과 요소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정신은 광헙위한 근대적 합리성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베버의 입장이다. ....

결국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은 합리주의의 전체적인 발전의 부분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듯 보이며, 또한 궁극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입장에서 도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p593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의 전체적인 실마리가 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윤리적으로 채색된 생활양식의 준칙이라는 성격"이라고 정의 하면서 이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간단히 말해 베버에게 자본주의 정신은 좀바르트와 근본적으로 달리 영리욕, 이윤 추구 또는 돈을 벌려는 욕구가 아니라 윤리이고 의무이행 이자 금욕적 생활양식이다. 그것은 오히려 좀바르트가 말하는 욕구의 합리적 조절이자 억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그중에서도 특히 칼뱅주의가 인과적 요소로 작용햇다는 것이 베버의 견해이다.

 

p600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자본과 시장이다. 즉 시작이라는 교환경제의 토대 위에서 자본, 즉 영리 추구를 위한 재화와 수단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자본주의경제가 존재한다. 여기에서 교환경제라 함은 생산물이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교환의 대상이 된다느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생산수단 역시 교환의 대상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경제에는 시장이 필수 불가결의 요소이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해보면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연경제가 된다. 왜냐하면 자연경제란 내적으로 자족적인 경제체계로서 교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외부와의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교환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거나 우연적인 현상으로서 궁극적으로 내부의 수요 충족을 위해서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보면 인류 역사의 아주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서 아주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자본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니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왔다고 말하는 것도 어쩌면 지나친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약탈자본주의, 모험가자본주의, 전쟁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해적이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약탈하는 것이 약탈자본주의이다. 그리고 경제적 재화를 획득하고 이를 통해 영리를 추구할 목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전쟁자본주의이다.

여기서는 베버가 분석한 고대 로마의 농업자분주의를 예로 들어 자본주의 개념을 좀 더 명백히 해보자, 베버에 따르면 고대 로마에는 다른 어느 시기나 지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농업자본주의가 존재했다. 이 농업자본주의의 존재를 가능케 한 자본은 일차적으로 노예의 비자유노동이었다. ....

베버는 로마의 몰락도 그 농업자본주의의 숙명과 연계해 설명한다. 로마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더 이상 정복할 지역이 없어지면서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평화의 시대를 의미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값싼 양질의 노예 노동력이 더 이상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즉 농업자본주의에 더 이상 합리적으로 자본을 제공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 로마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예경제 시대에 노예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산업시대의 용광로에 석탄이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619

프로테스탄티즘 연구에서 베버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예정론이 칼뱅주의자들에게 어떠한 심리학적 영향을 끼쳤는가라는 문제와 또한 이로부터 어떠한 인간 유형과 행위 유형이 형성되고 발전했는가라는 사회학적 문제였다. 칼뱅의 예정론이 초래한 심리학적 결과는 개인들이 처음으로 체험해보는 엄청난 내적 고독감이었다.

...비장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인간적인 교리는 그 장엄한 논리적 일관성에 몸을 내맡긴 한 세대의 정서에 대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즉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삶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영원한 구원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도울 수 없었다.-왜냐하면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신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620

이처럼 예정론에 의해 초래된 개인의 심대한 내적 고독감이라는 심리학적 효과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회학적 결과를 초래했다. 즉 칼뱅주의자들은 신으로부터 소명받은 자본주의적 직업과 노동에 헌신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윤을 쾌락이나 항략 또는 경제 외적 목적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지속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구원상태, 즉 자신이 신으로부터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에 속한다는 것을 내적, 외적으로 확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증은 물론 어디까지나 신의 은총에 대한 인식근거이지 결코 실재근거가 아니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근거이지 객관적 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따르면 신이 이미 영원으로부터 특정한 인간을 구원 또는 선택으로 그리고 나머지 인간을 저주 또는 유기로 예정했으며, 이는 신 자신도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에 주관적으로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행위구원주의 또는 행위구원사상이라고 하며 행위구원주의에 입각해 즉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 상태를 확증하는 것을 확증 사상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에도 예정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칼뱅주의에서와 달리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직업윤리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행위구원주의와 확증 사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종교적 의미에서 탁월하게 조직적인 삶을 영위한 인간은 항사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수도승뿐이었고, 따라서 금욕주의가 한 개인을 강력하게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그는 그만큼 더 일상적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갈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세속적 도덕의 초월에 특별히 거룩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최초로 제거한 이는...루터였고 칼뱅주의는 이 점에서 단지 그를 따랐을 뿐이다. 이미 세바스찬 프랑크가 종교개혁의 의미는 이제 모든 기독교인이 평생 수도승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적 상황에서 찾을 수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는 사실상 그렇나 종류의 신앙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p623

루터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칼뱅주의의 중간적 위치를 점한다. 즉 루터주의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적 성례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성례전이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는 관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p630

다른 한편 청교주의는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혁신적인 위치를 점한다

노동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무엇보다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는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이다.

 

p631

청교주의에서 그 정점에 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고행을 강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필요하고도 실제적으로 유용한 일에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p636

직업으로서의 경제, 직업으로서의 과학,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근대 시민계층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와 사회질서의 문화적 윤리적 기초를 이룬다. 왜냐하면 직업이야말로 주체적이며 자율적이며 자기책임적으로 행위하는 인간들에게 개인적 삶의 이상과 사회적 요구를 결합시킬 수 있는 기회와 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p636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가연에서 본분에 대한 헌신과 인격의 관계에 대한 논리가 예술가에게도 적용됨을 강조했다. 과학적 영역에서는 오로지 순수하게 본분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인격을 소유한다. 그리고 비단 과학적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자신의 본분에 그리고 오로지 그 자신의 본분에 헌신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을 행한 그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알지 못한다.

 

p639

사실 교회란 종교적 우원재를 신탁유증 재단처럼 관리하고 거기에 소속되는 것이 의무적이며, 따라서 그 무엇으로도 거기에 소속된 사람의 자질을 입증할 수 없는 은총기관이다. 이에 반해 분파란 전적으로 (이념상) 종교적 윤리적으로 자질을 갖출 사람들의 자발적 결사체이다.

 

p664

결롡적으로 말해 세 차원의 비교 종교연구를 통해 베버는 칼뱅주의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밝혀낼 수 있었다. 이 신앙 형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성, 즉 신중심주의, 금욕주의, 세속주의, 주관적 행위구원주의, 엘리트주의를 결합했는데, 이는 동양이나 서구의 그 어느 문화종교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칼뱅주의의 금욕적 프로테스탄지즘이 금욕적, 합리적 직업윤리에 기초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데 이념적, 종교적 인과 요소로 작동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버는 탈주술화되고 합리화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 이상 종교가 과거처럼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화적 의의를 니니지 못한다고 본다. 점차 다양한 종교 외적 문화 이상과 가치체계가 분화됨과 동시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면서, 종교는 점차 의미 부여, 가치 창출 및 사회 통합 같은 전통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이제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합리적이고 물상화된 사고 방식과 행위 방식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는 이제 다른 여러 삶의 영역들과 영원히 경쟁하고 갈등을 겪어야만 하는 문화사적 운명에 처해있다. 종교는 원래 최고이자 최상의 가치로서 다른 모든 삶의 영역들을 그 속에 포괄하고 있었으나, 탈주술화와 합리화 과정에서 그것들 스스로가 최고이자 최상의 가치로서 종교에 대항해 자기를 주장하고 관철시키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은 가치다신주의의 시대이고, 오늘날의 세계는 다양한 가치들이 영원히 투쟁을 벌이는 무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주체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원리와 원칙이다.

 "각자 인간에게는 자신이 지닌 궁극적인 입장에 따라 어떤 것은 악마가 되고 또 다른 어떤 것은 신이 된다. 또한 각자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모든 질서에 걸쳐서 일어난다"

 

p681

나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일할 수 있었다. 그 생각이란 지극히 간단하다. 즉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철학과 사회과학을 영어 번역본이나 연구서를 통해 수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참조할 만한 자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번역이나 연구의 관시, 대상, 준거 또는 토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참조하는 경우에도 원어를 통해 그것을 검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를 진정한 철학과 사회과학의 논의로부터 배제시키고 소외시키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배제시키고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배제시키고 소외싴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 자기소외와 자기 배제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영어로 된 Max Weber를 수용하고 번역하면 맥스 웨버는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박스 베버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영어화되고 미국화된 베버 논의에 머물 수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베버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

난세인 후삼국 시대를 그린 어떤 사극에서 젊은 스님이 법력이 높으신 큰스님께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놈아, 네 눈은 어디에다 두고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느냐?"고 제자를 책망하신다. ...요즈음 미국과 영어에 자발적으로 함몰되려는 한국 사회는 전 국가적 차원에서 그라이아이를 착용하거나 고승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고 근원적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저 억측에 불과할까?..

고승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태도는 근대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인 분화성과 다원성 그리고 자율성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p686

베버 번역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유희가 아니라 그리고 일시적이고 산발적인 유행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고 길게 호흡하면서 지속 가능한 지식 생산 프로젝트로 이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베버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병행해 지속적으로 논문과 책을 써 연구에 기초한 번역과 번역에 기초한 연구를 조화롭게 결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버를, 더 많은 베버를, 베버보다 더 많은 것을"이라는 모토 아래 베버의 번역과 연구를 추진해 갈 것이다. ...

나는 - 내 지적 훈련을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사회학, 사회심리학, 철학, 과학사, 신학 및 독어독문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대학에서 베버 연구로 마기스터 학위와 박사 학위를 그리고 짐멜과 베버의 비교연구로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했다. 이런 최소한의 지적 훈련을 바탕으로 삼십 년 이상 전력투구 하면 한 40-50권 정도의 크고 작은 책을 쓰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미약하나마 짐멜과 베버의 번역과 연구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고, 거치나마 지성사적 모더니티 담론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과학(학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경우 앞으로 나의 공부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짐에 따라 그리고 국제적으로 베버연구가 보다 진척되고 축적됨에 따라, 적어도 두세 번 대폭적인 수정과 보완을 거쳐야만 비로소 최소한 한국화 되고 토착화된 번역본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누군가 이를 이어 받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번역이다.

 

p687

요약하자면 이 책은 실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우리를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나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말이다. 한국 사회는 이 거울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객체화 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정신적, 문화적 능력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등학생들은 베버를 읽는 것보다 자연에서 모닥불 피우고 친구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이야기하는 것이 백배 더 교육적이다. 그리고 베버를 읽는다고 마지못해 고통스럽게 밤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 두 다리 쭉펴고 마음 편히 푹 자는 것이 백배 더 교육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한 지식 외에도-그것도 타자에 의해 외부적으로 강압적으로 주입되는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지식 외에도-육체적, 감정적, 정서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공동체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다양한 능력을 조화롭게 함양해 보편적인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교육하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 즉 대학 이전의 시기이다. 지식을 배우고 쌓는 행위, 그러니까 지적 능력도 일견 다른 인간적 능력과 무관한 고립적인 범주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보편적인 인격체의 유기적인 구성 요소가 될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학교, 교사, 학생이 교육의 주체가 되어 무엇을 읽고 토론할  것인가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 사회 및 국가는 이를 위한 객관적, 외적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로 족해야 한다.

'2011 > 11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느낌  (0) 2011.11.16
보왕삼매론  (0) 2011.11.15
산승불회_유철주  (0) 201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