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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여행길 2021. 2. 11. 08:33

p23

그 '보는 자리'가 중요하거든. 그 자리에서 세상 만사를 들여다보시는 분을 가리켜 수운이나 해월님은 '한울님'이라 했고 예수는 '아버지'라고 했지. 그러니까 뭐냐하면 언제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다가도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거야.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라든가 나무아미타불이라든가 하는 염念을 하면서 아버지의 자리로, 부처님의 자리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행하고, 사물을 보되 그 자리에서 보자는 그런 말씀이지. 그래서 그이는 가는 곳마다 제자리요 행하는 것마다 하느님이 행하시는 것이라, 행동거지가 그 '자리'에서 분리되지를 않지. 바로 예수가 그렇게 사셨단 말씀이야.

 

p33

간혹 소승에 속하는 아라한을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러나 아라한은 깨달은 사람이거든 . 아라한을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중생 제도에는 관심 없는 그런 사람으로 비난하는 것은 자네 말대로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왜냐하면 개체와 전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한 사람의 깨달음이란 그게 전우주적인 사건이거든. 아라한쯤 되면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자기 몸 밖에 어디 따로 있는게 아니란 말씀이야.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로 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그런 전일적 존재로 서느냐 못 서느냐, 그게 중요한 거지.

 

p35

이 점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대가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받은 자로서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道'인데 말씀입니다.

 

p37

요즘 감리교회에서는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를 자격이 없다고 해서 교단에서 재판하여 출교시킨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어쩐지 제 눈에는 불쌍하게만 보이더군요. 자기네 딴에는 진리를 위해, 교리 수호에 목숨 걸고 싸운다고 합니다만, 그게 기껏 잘 봐줘야 하느님을 섬긴답시고 그리스도인 잡아죽이러 가는 사울의 처신과 다를 게 없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무명無明이 그들의 눈을 가렸으니 사실은 싸워 무찌를 대상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 용서할 대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께 기도하셨잖아요? 저들은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저러고 있으니 용서해 주십사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게 봐야지. 바로 그 대자대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모자라면 모자라는 만큼 하나하나 처리하면서 그러면서 나아가는 거지.

 

p47

요즘 들어 부쩍 공동체란 말이 유행하는 것 같은데요. 심지어는 공동체 운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특수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제외하면  '공동체를 한다'고 소문을 내면서 시작한 공동체가 제대로 잘 되는 경우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어요. 역시 인위적인 의도가 앞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바로 그 점을 우리가 이 엄청난 격변의 시기에 잘 처리하고 넘어가야 하네. 우선 개체라는 게 어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주와 합일 속에 개체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勢르 ㄹ이루면 큰일을 해낸다는 생각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야지. 종교라는 것도 처음 시작할 때는 꽤 신선하고 발랄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굳어지고 그 껍질을 고집하면서 생명력을 잃지 않던가? 공동체라는 것도 그래. 거기 속해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도와 통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공동체라야 되겠지. 만일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한다고 하면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떤 소유를 고집하게 된다면, 그랬을 적에는 뭐냐하면 얘기가 뭔가 잘못돼 가고 있는 거지.

 

p48

저에게는 뭐 이렇다할 생활 신조라는 게 따로 없습니다면 틈틈이 스스로 다짐하는 건 하나 있는데요. 뭐든지 억지로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든지 말입니다.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든가 칭찬받을 만한 일, 심지어는 사랑하는 일까지도 포함해서요, 아무튼  뭐든지 억지로는 않겠다는 게 저의 신조라면 신조입니다. ...그래, 참 좋다. 성경 어디에 있는지느 모르나,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느님이 함꼐 하신다는 말 있잖은가?

있지요.

그게 무슨 말이겠는가? 가장 작은 자는 말이지, 당장 필요한 것 말고 뭐 더 바라는게 없거든. 배가 고픈 사람한테는 밥 한 그릇만 있으면 되고 추운 사람은 옷 한벌로 족하고 눈비르 가릴 오두막이나 심지어는 동굴이라도 만족하히까, 그런 사람이라면 더 큰 것을 바랄래야 바랄 수도 없으니까 인위를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저절로 '처무위지사'하는 거지. 그러니까 공동체를 한다 해도 기기 함께하는 이들이 도를 모시고, 부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살다보니 사회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함께 살아가는 거라면 처무위지사가 되겠지만 어떤 명성이라든가 우리가 이만큼 힘든 일을 한다느 자의식 따위가 앞선다면 그건 유위가 되는 것이요 업이 되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