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월

땅에 뿌리박은 지혜

여행길 2012. 12. 19. 16:56

땅에 뿌리박은 지혜 _모심과 살림 연구소_그물코

 

p17

'농부는 바보라도 할 수가 있다'라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바보가 되지 않으면 진짜 농부가 될 수 없다'라고 바로잡아야 한다. 농촌에서는 철학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다. '인생을 철학한다' '진리를 탐구한다' '인간 삶의 목적을 찾아서 도道를 구하면서 걷는다'라는 것으 도회지 지식인의 잉ㄹ이다.

인간은 왜, 어떻게 지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농부는 엇없다. 왜냐하면 농부는 태어난 순간부터 삶을 의심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를 찾아야 될 정도로 나날의 생활이 공허하지도 않았고, 의심의 불씨도 없었다.

 삶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면서도 실제로는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심과는 인연이 멀고, 근심이 없기 때문에 학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생과 사의 문제에 미혹되어서 도道를 구하여 사상적 편력을 한다는 것은 도회지의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웃으면서 무지, 무학의 평범한 생활을 계속한다.

 철학을 할 틈도 없고, 그래야만 할 필요도 농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에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단한 철학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은 필요 없다'는 철학이었다. 철학이 필요 없는 철인사회, 그것이 농촌의 진짜 모습이며, 농부의 근성을 오래도록 지탱해 온 것은 '일체가 필요 없다'는 무無의 사상이었고 철학이었다.

 

p30

왜 농촌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는가? 최근 30년 동안 농민이 겪은 상황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고,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심각한 상황에 맞닥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부가 자신의 어머니인 대지를 잊고 욕망을 따르게 될 때, 소비자가 생명의 양식을 단순한 영양식품과 구별하지 않게 되었을 때, 위정자가 농부를 업신여기고 실업자가 자연을 비웃을 때, 대지는 그 죽음으로 반응할 것이다. 자연은 이러한 인간에게 미리 경고하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다.

 

p26

소년시절의 이 일화를 돌아보면서 쓰노 유킨도는 전시하의 철저한 정보 차단의 상황에서 시골 농사꾼들이 학교 교육을 받은 자기들보다 어떻게 정확히 일본의 패배르 예견할 수 있었던가 라고 자문해 본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들과 같은 학생, 지식인들은 국가와 국가기관-학교와 신문과 방송을 포함하여-이 제공하는 선전 자료를 근거로 판단하고 있었음에 반해, 할아버지를 비롯한 농민들은 국가기관의 말은 처음부터 믿지 않고, 땅의 사람으로서 살아온 오랜 경험과 지혜에 의지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흔히 국가의 보호 아래 우리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생각하지만, 오랜 세월 땅에 뿌리박고, 땅을 의지하면서 정직한 땀을 흘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라 할지라도 국가의 논니에 쉽사리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군사 국가이며, 국가기관이란 결국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으로 땅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국가와 국가기관의 선전과 수사에 쉽게 설득 당하는 것은 이른바 계몽된,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쉽다.

 

p34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주역이 경제 개발에 힘쓴 박정희 정권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럼 요즘 정부는 경제 부흥하기 싫어서 혹은 제대로 된 개발 계획을 못세워서 경제를 지지부진하게 만들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정희 이후의 정부들도 한결같이 경제를 살리려고 노력했고 이를 위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왔다.  잘 살게 되거나 못 살게 되는 차이는 무엇보다 전체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에서 온다. 1960년, 70년대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와 명민한 머리를 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을 낳은 일꾼들로서 성실하게 뛰어왔다. 이때는 우리 정부가 외국의 일자리를 유치하려고 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한국 사람의 노동력의 수요가 많았지만, 요즘은 외국기업을 유치하거나 한국의 인력을 수출하려고 백방으로 애써도 세계적으로 점점 한국 사람들의 일손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따.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능력과 자질의 차이는 건강한 배후지의 생태적 기반에서 온다. 1960, 70년대는 못 먹고 못 살았다 해도 사람들이 대부분 총명하고 정신력이 강하며 건강하고 성실했다. 이런 두뇌와 능력, 건강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ㄱ구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개발이 되지 않아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물질문명이 훨씬 뒤쳐져 로마가 '촌놈'들이라고 경멸했던, 너무나 못 살아 로마인 대신 전투에 나가 싸워주던 게르만의 용병들이 거대한 로마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가졌듯이.

지금 우리 사회처럼 독성이 강한 유전자조작식품을 선두로 한 수입식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가고 환경오염이 심해진 곳에서는 사람들의 작업 능률도 떨어지고 성격도 불성실하거나 폭력 수준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마치 막강했던 로마가 수입 식량에 의존하고 본토가 산없으로 오염되면서 사회적으로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의 체력과 정신력, 번식력이 떨어져 결국 일개 게르만 용병대장에게 패망했듯이

 

p42

티베트의 지혜를 쓴 소걀 린포체는 어느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 볼 때, 혹은 실제로 죽음이 하는 일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섬세하게 하고, 살아 있는 시체처럼 그저 생존만 하는 하찮은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의미를 찾아내고 진정한 우선순위를 가려내도록 도와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찮은 활동과 사소한 관심거리로 삶을 가득 채우고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게 된다....사실 고통은 주로 집착에서 온다. 죽음의 임박성과 더불어 삶을 성찰한다면 우리의 삶은 순화될 수 있으며 또 만물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덜 집착하게 된다. 만물은 저마다 제때에 죽으며 바로 그것이 생명의 독특한 몫이라 하지 않던가.

 

p43

이 같은 인식, 곧 우리는 결코 자연과 그 땅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연과 우리가 본시 한 생명이라는 깨달음이야말로 우리의 실존적 불안과 생존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행동과 의식을 심층적으로 지배하는 근원적인 감수성이란 숲 속의 자연 속의 존재로서의 기억이라는 말처럼 진정한 자아와 지금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삶이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인 자연과의 교섭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돌아간다는 것은 땅과 함께 하는 농부로, 자연과 조화되는 삶으로 또는 죽음이란 한 의례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생명을 여는 일인 것이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죽음이 잘 그려져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땅에 뿌리박은 삶을 통해 적게 소유하되 보다 많이 존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 스코트 니어링은 그의 나이 백세가 넘었을 때, 지금 껏 살아왔던 한쪽 문을 닫고 새롭게 다른 문을 열듯 스스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

 나는 비록 그리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돌아보면 온 천지 모두 감사할 뿐 누구 한 사람, 어느 것 하나에도 내가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썼다.

 사실 산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먹을거리의 예에서 보듯 끊임없이 다른 생명에 신세를 지는 일이 아닌가.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대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듯, 마찬가지로 다른 생명을 떠나서도 결코 살 수없느 ㄴ존재인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 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가.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부모 형제 부부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이웃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어디 그뿐인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신세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생각해 보면 단순히 신세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것은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다른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결국 다른 생명없이는 '나'라는 존재 또한 없는 것이다.

 

p47

적게 소유하되 보다 많이 존재하는 삶을 사는 것...내 손으로 생명을 기르고 가꾸는 노동을 통하여 자연의 풍요에 동참함으로써 생계의 자립과 평정한 마음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 밖에 또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아직도 고향의 하늘엔 별들이 초롱하다.

 

p61

저는 도시 농업을 모든 사람이 농부로서 사는 길이라 봅니다. ...농부야 말로 천하에 제일 큰 근본, 그것은 단지 먹을거리를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흙을 살리고 자연을 가꿔 지구의 사막화를 막는 파수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옛날엔 임금도 개인 밭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선비도 공부만 하다가 도깨비가 될까봐 자기만의 일터인 텃밭을 일궜다고 하고요.

 

p66

저는 그것보다 농사짓는 과정 그 자체가 약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직장을 다니는 저희 아내는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밭에 옵니다. 밭에서 풀 매는 걸 제일 좋아합니다. 쪼그려 앉아 풀을 매며 맡는 흙냄새, 풀냄새가 너무 좋다는 것이죠. 삼림욕이 따로 없습니다. ...

뭔가를 먹어서 건강해지려는 것은 큰 착각이라는 말이겠지요.

 

p70

농사는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던 남편의 몫이고, 나는 그 동안 못 읽은 책이나 읽고 심심하면 텃밭이나 맬 생각이었다. 시골에 와서 처음 맞은 일 철, 들일이 시작되고 며칠도 되지 않아 농사는 함께 짓는 것임을 알았다. 들일은 외로웠다. 햇볕은 쨍쨍 내리 쬐고,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는 잡초는 두렵기조차 했다. 그럴 때 저쪽 골에 엎드려 말없이 호미질을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면 버틸 힘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 낯선 시골에서 흙만지며 사는 것이 썩 괜찮았다. 기대가 없었기에 잃을 것이 없었나 보다. 이니,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것을 얻었다. 생전 처음 내 손으로 심은 콩알이 재 몸무게의 몇 백 배나 되는 흙을 뚫고 초록 새싹으로 올라왔던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존재로 보면 저나 나나 똑같다는 것을 일어주는 듯, 작은 새싹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오랜 가뭄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세상만사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 보름 가까이 이어진 피사리에서 나를 들여다보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절절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려온 이곳에서 이토록 큰 선물을 받은 것이 참으로 고맙다.

농사는 이렇듯 은혜와 위로 그리고 가르침을 주지만, 때로는 아득한 막막함으로 나를 내몰기도 한다. 해도 끝나지 아낳을 것 같은 들일이 그렇고,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그렇다. 농사지어 먹고 산다는 것이 점점 더 암담하게 생각되는 현실도 두렵다. 이웃으로 살아야할 사람들이 오래고 단단한 문화 앞에서 숨이 막히는 때도 있고, 낯선 땅에서 사람으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데도 힘이 빠진다. 이곳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이태 전, 오랜 세월 엄격하게 유기농을 실천하며 농촌 문화와 공동체를 지키시는 어르신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극단적 원칙주의'의 길을 가는 분들의 말씀을 한번 듣고 싶은 터였다. 최소한의 원칙은 있으되 일상생활에서나 농사에서나 끊임없이 타협하는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어르신의 말씀은 역시 거침이 없었다. 절충이나 타협 없이 당신의 생각을 몸으로 사시기 때문이리라. 그이의 철저함과 엄격함은 땅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라는 물러설 수 없는 믿음에서 온 것이리라.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을 따라 별다른 생각없이 내려온 시골에서 내가 만난 것은 자연이었다....

경험도 기술도 일손도 부족하지만 유기농을 지향하려는 마음도 그것에서 비롯되었다.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투철한 의식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사와 땅에 대한 작은 원칙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

공생을 말씀하시는 어르신 앞에서 나는 내 속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개인주의를 떠올렸다. 복숭아 내느라고 며칠 쪼그리고 앉아 일했다고 강의 시간 내내 똑바로 앉아 있기 어렵게 허리가 아픈 것도 절망스러웠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자연이 일어주는 대로 가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나름대로 괜찮은 농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

10년이 넘게 농부가 되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변변한 준비와 공부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귀농에거 가장 큰 잘못이다.

그 땅위에 대궐 같은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실수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 외로 많이 들어간 자금도 그랬지만, 집 때문에 발목이 묶이고 만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으므로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골짜기에 겨우 논과 과수원을 마련했으나, 후에 진입의 문제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

초기에는 마을 사람들과 나쁠 일이 없었다. 외지인으로 조심하면서 주민들과 친밀해지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도저히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없었던 마음일에 나서면서부터 균형을 이루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이 일로 남편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곁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농촌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 마을 일에 대한 철저한 고민과 의지도 부족했다. 지혜와 역량 또한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마을 사람들과 친환경농업 모임을 시도하면서 길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시간은 걸리겠지만 이 같은 시도로 두 편으로 갈라진 마음이 다시 화합할 수 잇을 것이라 애써 믿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절감하고 모임을 떠나면서, 어디서든 사람과의 일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태고난 개인주의를 조금은 벗어났나 싶었을 때 일어난 일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으면서부터 나는 나 자신을 농부라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거기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 '젊고 많이 배운' 농부가 되었따. 만약 내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이 수식어를 영영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농부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수식어가 붙으니 더 부담스러웠다. 그것이 내가 두려워하던 '더불어 사는 삶'과 연관된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같은 자각에 오만이 있음도 느낀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오랜 문화속에서 축적된 무서운 힘과 지혜가 있는 것이다. 이곳의 삶에서 느끼고 배운 것을 어떻게 의미 있게 풀어갈지가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다.

 

 p76

내 손으로 논에 모를 심고 잡초를 뽑고 벼를 거두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님'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

고마운 것은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모습으로 사는 것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을 믿는다. 꿈꾸는 만큼 살 수 있다는 말도 믿는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귀농의 이유가 사람마다 다 같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꼭 한 마디로 시골에 온 이유를 대라한다면 이제 나는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라고 말하리라.

차조를 거둔 밭에 보리씨를 뿌리고 온 남편에게 물었다.

"왜 농사를 짓고 싶었어?"

"거기 무슨 이유가 있겠어? 그냥 짓고 싶었지"

"지금 바라는 것 한 가지만 말하라면 뭐야?"

"생활비만 벌 수 있으면 최고지"

 

p92

조물주의 창조질서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파멸이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이다. 생태계는 서로 먹이사슬로 얽혀 공생한다. 사람도 자연 생태계의 일원으로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면 인간끼리의 공존도 불가능하다.

유기농법은 대자연의 섭리에 눈을 뜨고 생명의 지혜를 토대로 한 사람다운 삶의 모습이며 대자연의 조화 속에 전개되는 생명을 존중하는 농법, 사람다운 즐거움과 충실을 가져오는 농법, 인류의 미래를 여는 농법이다.

 신념을 가지고 유기농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청빈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문화는 인간으로서의 기쁨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생산농민과 더불어 도시 소비자도 이런 기쁨을 가질 때만이 비로소 도농간의 공동체적 삶은 가능해질 것이다. ...이 근대 화학농법은 살생농법, 즉 죽이고 빼앗는 농법인데, 인간이 자연과 공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인간끼리의 공존도 가능하다. ...살생농법인 근대농법에는 공존해 갈 이웃이 없다. ....

항생제나 호르몬제를 첨가한 사료는 가축의 자연 치유력, 즉 면역력을 상실하게 한다. 또한 그 고기를 먹은 인간도 후천적으로 면역성을 결핍하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공존하는 이웃이라든지 도덕성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오직 냉혹한 이윤추구 외에 다른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이 오직 돈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길이다.

 

p101

농촌은 수난의 장소

수난의 역사의 상징

햇볕에 가려 그늘이 드린 곳

정성 다해 힘을 다해 도시를 먹이고 길러냈건만,

제 어미를 학대하고 빼앗아 이 천대가 웬 말인가?

그렇다. 흙을 헤치고야 싹이 나오듯

농촌의 짐을 지고

허위의 문명 밝힐 영원한 나라 세우는 일에 우리 목표를 걸자

바닷가 조개마저 기름 냄새로 먹을 수 없게 된 애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의 우맹들

새 시대의 총아는 농촌이다.

농촌의 미래는 사명을 자각한 인간교육에 있고

그것이 민족과 인류 문제 해결의 열쇠다.

-이찬갑 "풀무학교 개교를 맞이하며"

 

P103

시골에서 살면서 가장 크게 받는 혜택은 역시 자연이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이 나무와 풀꽃 이름 대기, 곤충 알아맞ㅎ기 같은 퀴즈에 참가한다면 도시 아이들보다 결코 나을것 같지 않다. 게으른 부모 탓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자연을 지식으로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싶지는 않다.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내가 일부분으로 속해 있는 환경으로, 암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으로 자연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큰 아이는 올 여름 방학 숙제로 가족 신물을 만들면서 이렇게 쓰고 그렸다. 집안에 들어온 개구리, 나방, 거미와 '어떻게 해?'하며 남감해하는 자기를 그리고는 '우리 가족, 곤충과 함꼐 살아갑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깁시다'고 썼다 여섯 살인 둘째는 겨울에 텅빈 화단을 보고는 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P108

아이들에게 충분히 주어야 할 것은 돈보다 시간이다. 나는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 저녁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하고, 아버지들은 아이 학교에 더 자주 가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별난 부모 만나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빼앗기고 있다는 힐난도 들었다. 하지만 교육도 행복해지기 위해 받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공부에 짓눌려 산다. 입시경쟁이 끝나면 이 아이들에게 행복이 찾아올 것인가. 정말 그러기를 나는 바란다. 그런데 묻고 싶다. 경쟁의 끝이 있다고 당신은 믿는지. 언제까지 미래를 핑계로 아이들의 행복을 유예시킬 수 있다고 보는것인지.

 

P113

오줌을 누려고 바지춤을 끌렀는데 변소 위 해바라기가 제 꼬추를 보려는 것 같아 재빨리 해바라기를 등지는 아이, 그 아니는 해바라기를 제 꼬추를 보려는 동부쯤으로 여겼나 보다. 무심결에 벌인 장난 때문에 발발 떠는 개구리를 보고 불현듯 두려움을 느껴 하늘에 대고 절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동무의 쌍욕에 기껏 '야 이 참나무야, 대나무야'하는 욕으로 응대하고 말았다는 산골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이 세편의 글을 음미하면서 동심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과 깊은 평화를 느낀다. 이것은 불과 한 세대 전의 아이들이 남긴 기억이다. ....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의 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에 유폐된 아이들은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 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소란스럽고 무례하며 폭력적인 이 모든 것들을 아이들은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

흙에서 땀 흘리며 사랑가는 인생을 짓밟고서 구축한 이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가장 악마적인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즉 아이들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P115

구체적인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농적인 요소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근대교육 태동기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복무하는 교육의 폐해를 내다보았던 교육사상가들은 노작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농적인 교육의 가치와 방법론을 정립해 놓았다. 우리 교육이념을 주물러 온 엘리트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노작교육을 지금껏 철저히 무시해 왔지만, 이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학교의 조그만 귀퉁이라도 좋고, 배후의 농촌에 있는 실습지라도 좋다. 아이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진 산업사회에서 유기농업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쿠바처럼 초등, 중등, 고등교육의 모든 과정 속에 농업 관련 이론과 실습을 의무화 해야 한다. 구소련 시절 국가가 개간하여 개인에게 공여한 소규모 개인농장인 러시아 '다차'의 성공적인 사례를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소유의 공유지나 노동력이 노쇠하여 경작이 불가능한 땅을 매입하여 기업이나 주민조직, 학교에 분양함으로써 주 5일제의 실시로 늘어난 시간을 흙 속에서 보내도록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P116

이제 문제를 단순히 하고자 한다. 우리 교육의 처참한 현실은 그 속에 농적인 가치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한 논객이 일갈한 것처럼 '지금처럼 아이들을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이 절박한 현실 앞에 우ㄹ의 어른들과 위정자들은 너무나 한가롭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P132

도법 스님께서는 지난해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떠나실 때, 사람들이 생명과 평화가 뭡니까?하고 물으면 지금 여기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고, 서로 나누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300여일 탁발순례를 거친 지금 스님께 다시 생명과 평화가 뭡니까? 물어보면 그 답이 완전히 바뀐다. 농촌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고, 거기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P134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이 묻는다. "당신들은 왜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자발적으루다가 선택하려고 해?"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의견을 말해 주었다. 가난에 대한 이미지는 가난이 가지고 있는 실제 모습이기 보다는 전쟁, 궁핍, 배고품 등 우리 현대사를 거치며 생긴 정서적 상처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경제개발 신화가 성공적으로 먹혀든 것도 이런 정신적 상처와 가난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위에서 말한 공선옥 씨의 소설은 가난을 관념으로 추구해서는 빈곤과 궁핍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이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행복한 삶으로 나타날 때에라야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는 비전도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P156

힐러리는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풍요의 나라 대통령 부인으로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어떤 것도 살 수 있는 지위에 있습니다. 그녀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인 방글라데시 여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났으나 암소도 , 자기 소득도, 아이도 딸 하나뿐인 힘이 없는 사람으로 보여 오히려 동정을 받게 됩니다.

 자립이라는 것은 돈, 지위, 교육, 특권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기초적 생존수단을 자급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을 갖고 있던 방글라데시 여인들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는 힐러리의 처지를 안타까워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수입상품 가득한 슈퍼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먹을 수 있는 내 땅의 내 나라 농산물입니다. 우리 농산물만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며 자급의 안정감을 줄 수 있고 이땅을 풍요롭게 합니다. 밥 먹는 이 누구나 농업을 깊이 생각하며 법안을 만든다면 건강도, 농업도, 환경도 살아 훨씬 살 만한 세상이 될 겁니다.

 

P161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며 누군가(무언가)를 무리하게 착취할 필요가 없는, 또 화폐를 얻기보다 노동 자체가 즐거울 수 있고 나아가 인간 사회의 필요 부분을 필요할 때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지역자급 경제 시스템, 그런 시스템이 목표일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지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속에 있다. 생산의 기반이 되는 자연이 있고, 자연을 채취, 가공, 보전할 수 있는 지혜가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먹을거리나 서비르를 거저 주고 받을 수 있는 나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도시는 필요한 자원을 지역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도시 내부에는 생산 활동의 근거가 되는 자연(농지)이 없고 볼거리의 경관으로서만 존재한다. 땀 흘려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노동이 없고, 누군가와 무언가를 위한 노동만이 존재한다. 이 점에서 도시는 농촌과 분명히 다른 사회다...이것은 도시와 농촌 사이, 농업과 공업 사이의 불균등 발전을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유래한다.

 

P162

먹을거리부터 에너지까지 자급 못 할 이유가 없어..

여기서 자급의 대상이 되는 것은 흔히 떠올리는 먹을거리만이 아니다. 개인 생활에서는 먹을 거리를 포함한 의식주의 자급이 기본이 되겠지만 지역으로 확장되면 전체 사회의 축소판으로 각종 서비스나 재화로까지 다양하게 확장되어 모든 것이 필요하게 된다. ..

첫째로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생산이나 생활 자재, 물, 에너지, 퇴비, 사료 등과 같은 유형 자원의 영약이다. 이런 것은 농촌이라면 예전에는 당연히 지역에서 자급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농촌은 먹거리조차 지역에서 자급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석유 에너지가 외국에서 수입돼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자급 연료였던 숲이나 땔감을 새롭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뒷동산의 목재를 헐값에 외부 목재상에게 넘기고 있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툅나 사료도 외부 업자로부터 현금을 주고 사 온다.

이런 것들이 발전이라 일컬어지는 아이

 

아이러니 속에 우리 농촌이 있다. 모두가 현금 없이는 세금 내지 않고는 확보할 수 없는 자원들이다. 하지만 이들 유형의 자원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농촌에서 재빨리 자급할 수 있다. ....

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정부가 농가에 직접 보조금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래서 농민들 자체가 정부의 정책에 그다지 종속적이지 않다. 하지만 20%내외의 낮은 재정자립도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지자체는 국가의 정책적 주문에 역행할 수도 없고, 독자적인 지역 정책도 전개하기 어렵다. ...

지역자급의 관점을 강조한다 해서 모든 것을 100% 자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접근은 오히려 자연계의 법칙에도 어긋난다...모자라는 부분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면 무리가 생긴다. 지역의 생태적 조건과 환경의 용량을 고려하여 자급수준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현재의 자급수준과 가능성, 조건 등을 다방면으로 진단하여 무엇을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가를 결정하면 된다.

 

P172

출발점은 지역 주민의 자각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자각은 애정에서 비롯된다.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역이 문제점도 대안도 보이는 법이다. 같이 고민하고 문제를 풀 동지도 나타난다. 모든 것을 개인의 자각이라 도덕적인 부분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정책이나 운동은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불과하다. 주민의 학습과 교육 활동이 항상 중시돼야 한다. 자신의 생활과 지역에 자부심을 가진 주민들이 서로 뭉칠 때 실타래처럼 엉킨 지역문제도 한 매듭씩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P177

착취에 기반을 둔 세계화 구조 속에서 어느 한 곳으로 부가 집중되면 될수록 다른 곳에서는 기아와 질병, 전쟁 등이 만연하게 되어 있다. 때로 강대국들은 부의 집중을 촉진하기 위해 기아와 전쟁을 조장학도 한다. 그러나 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구라는 유기체는 이러한 쏠림과 의도적인 파괴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자연재해나 괴질 도는 사회병리 현상, 테러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체제는 규모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치밀한 감시와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어디 한군데라도 잘못되면 바로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도 불안정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독재와 관료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불행한 것은 일단 이 체제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개인이건 국가건 파국에 이르지 않는 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체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고립 속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시나브로 자멸하기 십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안적 삶을 바라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대단한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

대안적 삶은 당연히 석유 문명을 넘어 궁극적으로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내는 전 과정을 말한다. 우선은 석유문명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대량생산(유통) 시스템에 복무하는 노동자(판매원)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서서히 발을 뺄 것인지,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과연 나의 영혼과 지구촌의 모든 이웃을 풍요롭게 한느 편명한 소비가 무엇인지, 나는 오로지 나의 편리만을 위해 스스로 치우지도 못하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사회 전체의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과연 무엇인지....

이렇게 석유 문명에 철저히 포박된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성찰한 다음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에 옮기려면 걸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령 내 손으로는 아무 것도 내게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없는 도시인이 슈퍼마켓을 통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규모 발전소에서 중앙 집중식으로 공급되는 전력선에 온갖 전기 제품들을 연결해 사용하는 마당에 소규모 대안 에너지 시설을 도입한다는 것도 실현서이 별로 없는 얘기다. 그러므로 대안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에너지가 되도록 적게 들도록 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안적 삶이 가능한 직업 또는 산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저 에너지가 적게 드는 생활을 살펴보자.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은 되도록 몸의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외부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몸을 써서 자급자족하게 되면 대량 순환 체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그만큼 몸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에너지가 적게 드는 제품을 선택하고, 몸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귀찮더라도 몸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역사 속 어디에서나 먼저 평화를 유린하는 특은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가 큰 무기를 들고 있으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너도나도 무기 개발에 나서기 때문에 평화는 늘 설 자리가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공원에서 칼 든 강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다수에 의해 지켜지는 도덕적 우월감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살상 무기와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에 대항해 소규모의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절대적 다수가 연대하여 저들의 큰 손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P185

1995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 고베 지역은 총으로밖에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뉴올리언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정전과 단수, 굶주림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돕고 배려하는 상호부조의 힘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복구기간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었다. 평생을 유기농업 운동에 종사해온 고베 대학 야스다 시게루 교수의 증언처럼, 그것은 세계 최대의 협동 조합 조직인 코프고베를 비롯한 고베 지역의 협동조직들이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운동가들에 의해 슈퍼마켓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던 '코프고베'의 취약한 조직력이 극한의 위기 속에서는 연대와 협동, 우애와 배려로 빛날 수 있었다.

 

P186

헤이즐 헨더슨이란 여성 경제학자는 오래 전에 산업사회의 생산구조를 크게는 시장과 세금으로 움직이는 공공영역으로 구성되는 화페경제 부분과 비화페적 경제 부분으로 나눴다. 그는 화폐경제 부분은 전적으로 비화폐적 경제 부분에 의존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화폐적인 경제 부분은 크게는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과 자연으로 구성되며,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은 공유, 호혜적 교환, 나눔, 자급을 원리로 작동하는 DIY, 물물교환, 사회 가족 지역을 유지하는 기초인 가사, 돌봄, 봉사활동, 상호부조, 노인이나 병자의 간호, 가정 내 생산과 가공, 자급농업 등을 포괄한다.

 그의 주장대로하면, 우리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 사회적 협동경제 영역 덕분이며, 화폐경제 부분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이 영역이 터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자본주의의 전개과정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습은 이 두 영역을 화폐경제 영역으로 끌어들여 점차 상품화해 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대책 없는 상품화의 확대는 인류의 생존 뿐 아니라 사회적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다.

 

 

P215

전략은 간단하다. 현재의 농업구조에서 얼마나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친환경농업' 체계로 전환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이때 단기적으로 부족한 농가소득은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전해 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걸 WTO의 용어로 설명하면, 동일제품likelihood-product문제라고 볼 수 있따. 유기 재배한 농산물과 그렇지 않은 농산물이 동일한 제품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추세는 점차 동일한 제품이 아니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 ...

스위스의 경우 전체 농산물의 10%까지 유기농 전환에 성공했는데, 이 변화가 최근 5년간에 이뤄졌다. 보통의 OECD국가들이 10% 수준까지 올리는데 보통 5년이 걸렸다. 이 수준이면 주요 곡물과 주요 축산물은 유기농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고, 일단 시스템이 안정화되면 점차적으로 50%이상이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적 여력이 생겨난다. 스위스의 경우 농업이 GDP의 2%를 차지하는데, 농업 및 농업 관련 고용은 총고용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제 농업 정책은 농업 산업 혹은 농민 정책에서 사회정책의 중요한 고리로 작동하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드주의를 거쳐온 사회에서 더욱 더 산업화의 기제로는 고용과 사회의 언저리에서 밀려난 빈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계가 대체한 작업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그야말로 자연이 감싸안는 셈이다. ...

세계적으로 친환경농업으로의 전환이 대세다. 단순히 음식을 안전하게 먹자는 의미만이 아니라 일자리 나누기로도 미처 소화할 수 없는 대량실업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농업 그리고 노동집약적 농업인 유기농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민소득 1만 불이면 충분히 안전한 음식을 먹고, 유기농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 국민 10%를 소화할 정도의 경제 여력이 된다. 기술혁신으로 더 고도화를 추진하는 산업부문과 전문화를 추구할 부분 그리고 노동집약적으로 전환할 부문들이 각기 분화돼야 한다. 전 부분에서 노동투입 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단조로운 진화만으로는 너무도 많은 국민이 불행해질 뿐이다. ...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농업에서는 현재 안전이 최고의 경쟁기준이 되어 있다. 이제 우리 농업에서도 화학비료와 살충제 그리고 제초제를 빼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화학약품이 사라진 빈 구석을 사람들의 손으로 채우게 되는 것을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유기농업으로의 대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헬기로 농사지으면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는 구시대의 아름다운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헬기로는 델몬트를 절대로 이길 수 없고, 카길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투기꾼이 아니고, 또한 공업화와 산업화를 지켜낸 대다수의 국민을 여전히 지혜롭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에게는 농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석훈)

 

P236

생명은 다양성입니다. ...이윤 창출을 위한 대기업화 다국적기업화가 근본적으로 생태적 탈 중심적 삶의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함구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에 유리한 세제, 재정지원 규제 등을 적극적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독점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 자유시장을 논하고 있지만 자유시장이란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를 점점 더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경제적 세계화는 재화의 수송거리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버터, 우유, 살아 있는 동물 등의 수출입도 포함됩니다. 같은 종류의 물품들이 서로 스와핑 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대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말이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화 경제활동의 지역화입니다.

...오늘날 슈퍼마켓에서 지불하는 식품 값 중에서 정작 식품 자체에 대해 지불하는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고 대신 수송비용, 포장, 광고, 발색 등에 지불하는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슈퍼마켓에서 지불한느 식품값의 5%만이 식품 그 자체의 값으로 농민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머니 95%의 돈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하는데 돌아갑니다. 심지어 이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릅니다. 비밀이니까요. 가령 방사선을 조사하거나 유전자 조작 씨앗 따위를 만드는 데에도 우리가 지불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농부들과 소비자들 상의 간극을 확장시킴으로써 불리시키고 있는 것은 기업의 중간상인들과 정부의 보조금이라는 사실을 꿰둟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현재 시스템의 두 번재 근본적인 특징은 지금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정보, 다시 말해 학교, 대학사회, 과학계, 대중매채 등에서 나오는 모든 지식과 정보들이 점점 더 전문화 상업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전일적인 지식, 전체적이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호 연결된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과학, 대중매체 나아가 학교의 기업적 통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식의 기업화, 상업화는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한 흐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점점 더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구에 대한 진실한 관심에서 나온 정직한 조사와 정보는 점점 드물어지고 있고, 이를 위한 경제적 지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

가장 중요한 활동은 우리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며 우리가 배운 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열명의 친구가 모여 정보를 취합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다른 이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일, 비디오를 같이 보고 책을 같이 읽는 지역공부모임을 만드는 일 등, ....이런 활동을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 공부뿐만 아니라 함께 노래하고 함께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즐거움도 가져다줄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또한 세계 경제의 압박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벗어나게 해주는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는 우리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북돋우는 일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종류의 명상 또는 노래 부르기 등일 것입니다. 즉, 잠시 동안 지적인 활동을 멈추고 더 행복하고 더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가 될 때까지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 점점 더 분석적인 방식으로 너무나 힘들게 경쟁하고 일하며 기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복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휴식과 명상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 불행의 상당 부분이 육체적 움직임이 부족해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법을 익히기 시작할 때,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자라나고 폭력성이 감소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을 움직이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 시스템의 또 한 면은 우리들을 스스로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인위적인 소비문화로 내모는 것입니다. ... 전 세계적으로 이 소비문화는 자기 자신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잇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식적으로 지역중심의 생활문화를 재건설해야 합니다 지역중심의 삶의 문화는 사람들을 광고와 텔레비전, 대중매체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텔레비전과 매스미디어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이미지는 일반인들에게 열등의식과 그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완벽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p242

우리가 자연과 동물,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의 일부라는 의식을 재구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자연세계와의 결합-어떤 사람들은 자연세계와의 이 결합을 영적결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명, 우주에 속한다는 의식을 갖게 해주는 심원한 결합입니다.

 공동체 차원에서 위로부터 우리를 압박해 오는 이 거대한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즉,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역경제를 재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

제가 지금까지 개괄한 모든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의 변화들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현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몇몇 연구에 따르면 전 인구의 30%정도가 현재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차원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

많은 사람들은 농사에 대해 생각할 대 그저 경작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농부와 농사일을 어떤 방향으으로 내몰고 있는 경제의 보이진 않는 손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도는 이야기이지만 생산자와 솝자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다작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농부와 소비자 모두에게 막대한 생태적,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p248

믿을 것이라곤 오로지

마을바르고 부지런하여 굶는 법 없으리라는

조상의 가르침 그것 하나뿐

그 마음 뼈에 새겨서 살아온

사람들이여..

알고도 스스로 인종함은

 거룩한 봉사라

이 선의 사람들에게 어찌 끝없는 어둠만이 있을 것이랴.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ㅇ 호미 씻고

돌아와

마당가 멍석자리

삽살개와 함께 저녁을 나눠도

웃으며 일하는 마음에 복은

있어라. ...

 

조상이 끼친 업을 길이 지키는

사람들이여!

정성과 노력이 있을 뿐 분수를 넘치지 않는 사람들이여

몸쓸 세상에 하늘이 보내

착한 사람들이여

농민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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