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월

왜 동양철학인가_ 한형조

여행길 2012. 9. 23. 16:38

왜 동양철학인가

접근, 제자백가, 주자학, 그리고 전망

한형조 _ 2011 _ 문학동네

 

접근

신성한 텍스트는 해석되거나 번역되지 않았다. 성전을 비판의 공간위에 올려 놓는 것은 불경에 다름아니었기에

암송에 암송을 거듭하다보면 어느날 글의 이치. 즉 문리文理가 자연스레 통할것이라고 ...

논문이라는 서구적 양식 도입되어 논리적 논증양식 요청하게 되었지만 동양철학은 재래의 사제적 집전 계속해왔다.

..

그러나, 성전이 과연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했다.

서당 절간에서 성전으로 전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성전 또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고도로 세련되고 추상화된 개념이나 언설에도 내밀한 경험이나 남모를 고통 혹은 문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요컨데 그들을 성전에서 인간과 삶과 역사의 체취를 맡고 싶어한다.

텍스트의 언어부터 일상으로 돌려 놓아야

언어는 소통의 당사자 간에 공유되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남아있는 문자 기록만으로 조선조 복원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찰이후 텍스트와 더불어 일체감 느끼고 그것을 음미하며 즐기기 시작 ->텍스트에 대한 연구 이해 깊어지면 또다른 세계 열린다. (텍스트와 일체화 되어 있던 자신이 점점 낯설어지고, 고착 편견에서 벗어나고 처음의 견해를 교조화 우상화하지 않고 다양한 텍스트와 사상 복합적 입체적 조망)

한사상이나 철학은 기존의 사유와의 대결과 착종에서 형성되지만, 그 바탕에는 실존적 경험이나 사회적 요청이 깔려 있다.

현실적 실용과 미래적 전망을 획득하지 못한 사유는 언제나 자연도태했다.

토대에 대한 연구, 곧 사상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절실한 이유 여기에 있다.

동양철학은 하나가 아니다.

각 지역의 관심과 요청에 딸 전통에 접근하고, 그것을 자원화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

 

제자백가

 

불교-일상의 역설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지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I hope for nothing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I fear nothing

나는 자유롭다.  I am free

 

불교는 말한다. "진리란 없다. 특히 영원 불멸의 진리란 것은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해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다. 알수 없으니 전할 수도 없다."

그럼, 8만 장광설은 무엇인가? 선의 어법 빌리자면 그건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돈 일뿐 진짜 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절대의 거소를 가리키고 강을 건네주는 유용한 도구일 수는 있다.

불교는 실용주의, 휴머니즘 기반으로 한다. 그곳에는 이단이란 개념 들어설 여지가 없다. 필요한 대로 갖다 쓰면 그만이지 꼭 한가지 도그마 고집할 이유 없지 않은가

그래서, 8만 장경 서로 모순 대립되는 견해 교설 포괄

 

일체개고 _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고苦의 실체는 명상이 깊어가고 삶의 실상을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깊어질 것이다.

나의 이익은 타인의 손해이고, 나의 기쁨은 타인의 슬픔이기 십상이다. (인연법에 따르면 타인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 없다.)

시기와 질투 원망과 비교 학대와 자기연민 하루 지나면 곤죽이 된 몸으로 귀가 ...불교는 이 현실 근본적 개혁 위한 시도

 

대승시신론.  방만에서 응축으로. 고통의 실제와 그 고통의 강을 넘어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근본적 취지에 비추어 불교는 너무 어지럽게 중구난방해왔다는 자각과 반성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야말로 골격만 앙상하게 남긴 불교의 문법이자 설계도

 

선. 응축으로의 회귀의 극에서 불교는 동아시아에 특이한 종파탄생시켰다. 선이 그것이다.

이 움직임 5세기말 6세기초 <능가경> 연구하던 조그만 모임에서 발원. 그들은 불어심위종(佛語心爲宗, 부처가 설한 가운데 핵심은 마음)이라는 구절 발견.

 

세상의 불편, 고통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불교는 삼계의 비참과 중생이 소외를 외부적 조건에서 찾지 않고, 역사적 산물로 돌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마인드가 약하다.

고의 원인은 실존적 지평 원초적 무명 無明 avidya(밝음의 결여, 실재를 보는 눈이 흐려져 있다는 뜻)에 있다.

맹목의 의지는 고요한 근원 에너지 격동시켜 주체 혹은 자아 형성시키고, 곧 그 짝인 대상을 불러온다. 이들 결합하여 인식을 구성(인식은 분절된 세계, 경계)

일상의 인식은 객관적이지 않다.

인식은 주관에 의해 왜곡된 사물의 이미지 들의 집적일 뿐

 

진리를 바로 보고 본원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뿌리깊은 습관인 자아의 분별vikalpa떨쳐내야 한다. 불별이야말로 이 세계 전체의 고통 산출하는 무명의 핵심

내가 나를 비우고 세계와 더불어 깊은 신뢰와 일체감에 싸여 있을 때 그때 에너지는 낭비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본원의 분수를 회복한다.

그 에너지는 누가 나에게 부어준것 아니라 내가 본래 갖고 있던 것. 본원의 순수하고 고요한 인간의 에너지=일심 一心

본래 성취된 구원의 세계를 단순한 추상으로 자기와는 먼 초월적 공간, 혹은 신의 은총 계시 빌려야만 기약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디서 찾고 있느냐 네가 곧 부처다" 우리 자신이 바로 궁극이며, 부처이며, 본원청정이며 법계의 실상임을...

 

무심히 밥을 먹고 있을 때 나는 없다. 내가 없으니 밥도 없다. 거기엔 순수한 에너지 흐름. 전일한 과정만이 존재한다.

분절과 이원화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진리를 위해 살겠다는 것조차 또다른 지옥업

선은 더이상 구원의 문제와 신학과 종교로 호들갑 떨리 말라고 충고한다. 초자연적 실재란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이다.

실재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구원이고 법계이다.

 

3. 유교-도덕적 신성

사람들은 유교에서 도덕적 설교나 에티켓의 지침을 읽지만 그 오랜 세월 유교를 지탱해 온 것은 인간의 초월적 본질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었다.

그런데 왜 유교룰 무신론적 체계로 규정하게 되었을까?

외재적요인 : 서세동점의 시기, 유교는 동아시아 대표해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자기정체성은 변별과 대치에서 온다. 신이 지배하는 기독교 문화와는 달리 유교는 휴머니즘. 즉, 이성의 기획으로 세운 인물적 문명이라는 주장이 자리잡기 시작

내재적 요인 : 유학이 단일한 체계와 교조를 갖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체계도 수정이나 혁신없이 수천년을 갈 수 없다. 유학 또한 시대적 변화 요청에 따른 굴곡있었다. 공자의 창시, 유교학단 분화-> 춘추전국 주도권 다툼 -> 진시황 통일, 한 -> 유교의 국교화 ->훈고학 발달 -> 수, 당대 침체 -> 주자학 융성 -> 양명학 대두 -> 청대 실학 -> 현대 유학

 

인지가 발달하기 이전 자연은 과학적 관찰과 이론의 대상이기 보다는 그 자체 애미니스틱한 힘을 갖고 있는 불가해한 의지 -> 하늘의 명은 자의적이거나 변덕스럽지 않다. 신들은 제물이나 아부에 기뻐하지 않고, 의무와 덕성에 기뻐하게 되었다. 하늘은 인간에게 도덕적 자각과 정치 사회적 책임 촉구하는 존재로 진화

공자가 말을 아낀 것은 종교적 체험이 이론적 교설로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자각을 통해 일상에서 터득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 자사는 할아버지의 위대한 기획을 이렇게 요약했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인간의 본질은 초월적 근원을 갖고 있다. 삶의 의미는 그 초월적 본질 실현해나가는데 있다. 그길 닦아 나가자는 것이 교육과 수양이다."

 

근대적 사고는 유학의 원리의 반대편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돋ㄱ감이 아니라 사적 욕망으로 보며, 사회를 자기 절제와 배려가 살아 있는 공동체적 유대의 장이라기보다 여러 개인들이 물질을 소비하고 타자와 경쟁하는 공간으로 이해한다. 과학의 기술은 이같은 이념에 딸 욕망의 무한 충족을 위한 수단과 도구를 제공하고, 법률과 제도는 도덕과 관습 대신 분절된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파수꾼으로 등장했다.

 

p76

사회적 안정과 신뢰는 노골적인 상업적 원리를 축으로 해서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부국강병의 방책을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어째서 이利를 논하시오"라고 나무랐다. 경제적 의미와 자유와 평등은 결국 투쟁과 약탈, 불신과 혼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성격이 운명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성격이 모듬살이의 건강을 좌우한다. 우리 사회, 우리 문명은 건강한가. 만일 우리의 취득적 사회가 불건강하다면, 다가오는 사회, 새로운 문명의 성격을 어떻게 기획하고 형성해나갈 것인가.

 

p78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옛 시대의 현자들은 소극적 해방이 아니라 적극적 해방을 꿈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적 조건과 신분적 구속과 제약 속에서도 인간의 창조성을 고취하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강조했다.

 개인의 성취와 사회적 질서의 조화는 인간이 외부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본성에 맞게 다듬나가는데 있다. 이 자기 훈련 self-discipline의 관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인식론적 전환을 위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분명하고 절실한 카드이다.

천릿길도 첫걸음부터이고,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그만큼 생활 속의 규율과 일상적 습관이 갖는 의미는 심원하고 결정적이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 나의 행동과 선택을 필요로 하는 '아주 작은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 의미와 보람은 바로 그곳에서 창조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일상이 곧 초월이고, 학습 없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p105

신비주의적이란 말은 어떨까. 장자는 우주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을 '운명에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이란 말에는 인위적 의식적 냄새가 묻어 있다. 차라리, 자신에 대한 적극적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이라면 어떨까. 내가 지금 무슨 횡설수설인가. 그의 생각을 알려면 우선 세계와 영원 혹은 진리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각을 알아 보아야 한다.

 

p109

장자는 이들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의 비본질적 소외이며, 이 소외를 극복하지 않는 한, 비극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예연자적으로 설파했다. 그렇기에 그의 언어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역설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영속시키려 하며 소멸을 두려워한다. 근본적인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바로 이 하드코어를 둘어싸고 펼쳐져 있다. 장자는 이 무의식의 뿌리를 넘어서지 않는한 해방이나 자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자도 불교와 더불어 '나없음 喪我'을 강조한다.

 

p112

기쁨과 노함,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후회, 주저와 공포가 우리를 번갈아 찾아온다. 구멍에서 울리는 소리, 습기에서 피어나는 버섯처럼. 주야로 마음속에서 갈마들지만 어떤 것이 어떻게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호라!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들이 말미암는 생성의 매커니즘을 붙잡을 수 없을까. 이들 감정들 없이는 내가 없고, 또 내가 없으면 이들 감정들을 느낄 무엇이 없다. 겨우 여기까지 더듬을 뿐. 아무래도 모를레라, 놀이를 시키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참주인이 분명 있을 듯한데 거기에 이르는 단서가 가려져 있다. 움직이는 힘은 느껴지나 그 모습은 볼 수 없다. 안을 보면 실재하는데 밖을 보면 형태가 없다.

 

p123

삶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낙관적 기대도 비관적 탄식도 없다. 낙관적이나 비관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선 사람은 그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여기서 장자의 그 특유한 웃음이 시작된다.....

"땅 위에 두면 까마귀밥이 될 것이고, 땅 밑에 두면 개미밥이 될 것인데, 굳이 이쪽 밥그릇을 저리 넘길 일이 무어냐"...

"나는 원래 없었던 생명이 아닌가. 없었다가 있었던 생명이니 있다가 없은들 무에 대수로울 것이 있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 연쇄 유추가 그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남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말하려는가. 그는 아내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관건은 자기 중심적 관심을 떠나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세계는 미망과 환상의 거죽을 벗고 시린 가을물처럼 투명하게 드러난다.

 

p126

본래 평등했던 세계는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도구적 관심이 희생이 되어 구획되기 시작했다. 책상을 탁자나 꽃병, 혹은 교사와 학생으로 부터 구분하는 것은 책상의 본성이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책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일체된 공간속에서 의자와  칠판, 필통과 가방, 학생과 교사와 더불어 존재하낟. 그렇지 않은가. 책상과 그것이 기대고 있는 교실 바닥을 구분하는 유일한 근거는 유용성이다.

 

p130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어하고 올빼미는 쥐를 즐기는데, 이 넷 중 누가 참맛을 아는가. 또 성성이는 원숭이와 짝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어울리며 미꾸라지는 고기들과 노닌다. 사람들이 모장과 여희를 예쁘다 여기지만 그들을 보면 고기는 물속으로 깊이 숨고 새는 하늘로 푸드덕대며 사슴은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치니 이 넷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아는가. 내가 보건대는 인간성 仁과 정의 義의 단서와 옳고 是 그름 非의 갈래는 이렇게 엉클어지고 혼란되어 있으니 그 다툼을 어찌 제대로 가려내겠는가"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장자가 인간이 아닌 자연을 잣대로 삼은 이유는 훨씬 심원한 데 있었따. 인간 중심주의는 인가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징표임을 그는 간파했던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임을 주창한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또한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명제가 필연적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곧 독점과 권력을 향한 인간 사이의 혈투의 무대 속으로 던져진다. ...공동의 ㅈ거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권력을 둘러싼 동지들 사이의 핵분열과 이합집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여, 인간사회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임을 내세우는 수천수만의 에고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해가 서로 다르고 득실이 상충하는 곳에 일치된 합의를 기대하기는 무망하다.

...사람을 설득하려 애써본 사람은 안다. 논리적 정합성과 합리적 계산은 단단한 자기 이해와 편견앞에 거의 무용지물이다. 혹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그건 상황이나 권력의 압력에 굴복한 양보이기 십상이다. ....

인간은 무서운 동물이다. 장자는 말했다. "인간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그 깊이는 바다보다 측량하기 어렵다"....

현실은 표피적이고 즉물적인 차원을 장악한 편협한 지식에 의해 장악되는 비극이 연출된다. 장자는 그것을 이렇게 개탄했다.

"매미는 얼음을 얘기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으며, 반편의 지식인은 진정한 길을 말할 수 없다. 매미는 시간에 잡혀 있고, 개구리는 공간에 잡혀 있으며, 반편의 지식인은 자신이 배운바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이나 자기 집단의 이해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되고, 그것을 공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그는 가능한 모든 논리와 언변을 동원한다. "시비를 가릴 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주저없이 날고, 붙잡은 것을 지킬 땐 하늘에 맹세라도 한 듯 꿈쩍 않는다" 인간사의 비극과 사회적 혼란이 이로부터 생겼다.

....장자는 그렇지만 자기 이해와 권력의지가 충돌하고 있는 한 논변의 귀일은 물론, 인간세의 평온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근본적 회의주의자였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세상사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한 해결을 없다. 논변을 쉬어야 논변이 보일 것이고, 세상을 넘어서야 세상이 보일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 혹은 인간이 우주의 무대 뒤로 사라진 그 막막한 공간을 떠올려보라. 혹은 적극적으로 자연이라는 전체적 운행의 그 중심축을 파지하여 천지와 더불어 호흡하라. 하늘의 균형은 너와 나, 현실과 꿈 사이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그리 그리던 영원의 평화를 찾아줄 것이다. 그때 삶은 유쾌한 나들이로 세상은 한바탕 축제의 무대로 화한다."

 

p156

자유와 권리 같은 취득적  공격적 구호를 톤다운시킬 필요가 있다. 전체적 시스템을 돌아보지 않는 개인의 이기와 집단의 자기 주장은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책임과 헌신의 자세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인간은 원자화된 파편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 전체에 협력하지 않으면 개인은 존립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엄정한 유기체의 진실이다.

 

p162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행동non-action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동에의 권유이다.  자연은 인가의 개입을 줄일 때 본래 예비된 순수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p188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처럼 주자학 또한 "인간은 본시 완전했다"고 말한다. 다만 신체를 갖추는 과정에서 일탈이 생겼고, 세속적 습관과 교육이 고향-망각을 더 가속화시켰다고 탄식한다. 주자학은 이 편차를 교정하여 완전에로 이끄는 것을 인간의 과제로 설정했다. ....

여기서 주자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죄'나 '불복종'이 아니라 '마비'로 규정하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주자학의 기획은 마비로서의 불인 不仁 을 풀어 다시금 仁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로 요약된다.

 

 

p191

영웅적 순례는 결국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 점에서 주자학은 화엄의 선재동자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닮았다. 그래서 위기지학 爲己之學, 즉 '진정 나이기 위한 공부'라고 불렀다. 진정 내가 된다는 것은 번역하자면 내 안의 '비린내와 기름기'를 씻어내고, 답답해하던 본원에 숨통을 열어주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해도 울타리를 넘지않는", 이경지, 중용에서"생각하지 않아도 길이 보이고, 힘쓰지 않아도 중용을 얻는" 그 경지가 펼쳐진다. 이때 외계는 이제 나에 대해 더이상 적대적이기를 그친다. 나의 에너지는 상황에 대해 무심으로 응답한다. 이제 나는 대립과 갈등을 겪지 않기에 나늬 에너지로 감각되지 않고 우주적 에너지로 자각된다.....그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대해 자신의 보호막을 치고 의도적 격절을 꾀해왔다. 이제 그 장막을 걷는다. 내가 장막을 걷으면 우주 안의 사건은 기의 연속성에 의해 나와의 기맥을 소통시킨다. 하여 사회의 건간은 나의 건강의 바탕이 되고, 나의 건강 없이 우주는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인한다.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은 결국 나의 문제이다. 사회적 문제 또는 우주적 네트워크 안에 있고, 그래서 더이상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파지된다. 성현이란 바로 이 경지에 이른, 천지간의 건강을 성취한 사람이다.

 

p215

서양철학을 처음 배울 때 느낀 곤혹을 기억한다. 플라톤은 다양하게 변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영원히 불변하는 이데아, 즉 관념과 명칭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중세에 있어 현실적 real 이라는 말 또한 초월적 관념과 신의 세계였지.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사물과 사건은 여기 초대받지 못했다.

근대는 이 상황을 역전시켰다. 사람들은 정신이 아닌 물질을 현실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형이상학이 형이하학에 밀리고, 종교 대신 과학이 최고의 지위에 오르면서 삶의 전 부면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자본과 산업, 재화와 권력을 축으로 한 욕망과 그 충족의 변증으로 읽는다.

...금강경은 말한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 아닌 줄을 안다면 너는 부처와 대면할 것이다"

 

p230

현대의 인간은 자신이 이전의 누구보다 억압이나 권위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보이는 억압은 줄어들었으되, 보이지 않는 감시가 삶의 전반을 규율하고 있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바저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는 예속적 상황을 살고 있다. 지금처럼 개인의 욕망이 권력과 산업, 매스컴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된 시절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태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거대한 무지와 환상의 비현실 속에서 추상적이고 타율적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그것은 흡사 스피노자가 지적했듯 돌멩이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중용은 "사람들이 저마다 똑똑한 척하지만 함정과 덫에 걸리는 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인간이 아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그 실현을 둘러싼 쳇바퀴의 메커니즘이다. 그는 '현실'을 욕망 충족적 전망에서 그를 위한 경제적 부와 성공의 취득적 지평에서 읽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상에서의 행복을 결과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욕망이 욕망인 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파천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위대한 기획 혹은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루어진다해도 행복은 기약되지 않는다. 모든 욕망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이 '자신의 내적 본성'과 합치하지 않으면 그 충족은 곧 소모와 피로, 그리고 사회적 해악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의 내적 본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지평은 설교로 확인되는 것도, 교화로 설득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적 주시와 자각, 그리고 체험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동서양의 현자들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과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 본성에 따라 그의 에너지를 유도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심신의 건강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리주의나 쾌락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더불어 동의하고 있는 인간의 충동과 그 실현에 대한 무제한의 허용과 약속과는 전혀 다른 이념적 지형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자각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목표를 향해 자신의 에너지를 동원해야 한다.

인간은 탄생으로 완전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예비된 天命' '성장의 방향과 목표 性'를 따라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인격의 건전성과 사회적 유대를 기약할 수 있다.

 

p238

노장과 불교, 기독교는 유학의 관점에서 보면 교각살우의 혐이 있다. 즉 우상을 숭배하고, 환상에 취한 인간의 집단적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너무 독한 약을 쓴 나머지 '일상'을 넘어버리기 일쑤였다. 주자가 불교를 비판하는 핵심이 이것이다. 그럼에도 그 극약 처방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소외와 비본래성이 얼마나 깊이 인간의 삶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유교는 두 극단을 피해 중용 中庸을 기획했다. 의미는 오직 생활 속의 규율과 일상적 습관에 있다. 바로 그 신기할 것도 없고, 통속적인 삶의 자잘한 현장이 의미가 구현되는 성소이다. "중용의 도는 부부에서 출발한다" 가장 비근하고 친근한 기거와 교제, 일과 놀이를 의미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 중용은 말한다. "높은 지위와 많은 재물을 사양할 수도 있고, 흰 칼날을 맨발로 밟기는 쉬워도 중용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미와 존재를 '자신의 밖에서' 추상적으로 찾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중용은 그것을 경계해 마지않는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목표를 현실 바깥에서 그리고 자신의 일상적 삶의 공간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곧 성사이다.

 그런 점에서 유학은 하드웨어가 필요하지 않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며, 휴식하는 바로 그 자리가 의미가 구현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위계는 거추장스럽다. 서원이나 사당은 없어도 좋다....단 하나의 조건이라면 자신과 관계하고 동시에 타자와 관계하는 인간 조건이 있을 뿐이다. 서원이든 사당이든 유교의 건축과 상징에 장식과 문양이 극도로 절제된 이유가 여기에 있따. ...유학은 바로 그 자잘하고 통속적인 일상 속에서 보상도 기대도 없이 올리는 자신을 향한 예배이다.

 

p251

화두는 일상의 에너지가 분별로 전이하여 '왜곡'되고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한 차단장치 중 하나이다. 그 차단이 깊어지면 산란으로 흩어지던 에너지들이 지속적 '집중'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본래면목'과 직접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화두의 무의미한 차원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p252

나는 화두를 들기보다 차라리 서암의 화두처럼 '주인공'을 부르는 성성법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대개 무의식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선사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각성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 본질과 분열되지 않고 일체가 되며,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주적 화해의 무도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 의지와 욕망의 미세한 흐름까지를 각성하고 제어하는 통제력이 더 긴요하다. 자신의 호흡과 심신의 활동을 끈기 있게 파지하는 '자각의 훈련'이 지속되면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거친 오염들이 줄어들고 이윽고 미세한 의지의 충돌이 들여다보일 것이고, 심신은 점점 더 훨거워질 것이다. ....

이 자각의 수련은 삶의 공간, 즉 일상의 일과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실천할 수 있다. ...바람직한 수련은 그 자체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 .....

궁극적 진리를 보겠다는 초조감에 화두에 드는 자신을 늘 열패감에 시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력하게 하기 쉽다. 그 제자리걸음은 쉬 피로해지고, 흔들린다.

 

p255

장자에 이런 비유가 있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데는 땅을 밝고 가야 한다. 그런데 발 딛는 자리만 필요하니, 나머지 땅은 다 파버리면 그 사람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냐. 없다. 마찬가지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와 과정이 필요하다....스승이 오랜 연구를 통해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제자는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배우면 제자의 성장은 멈춘다. 그는 스스이 갔던 길을 그대로, 아니 스승보다 더 고통스럽게 다시 밟아야만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 선의 불립문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선이 불립문자를 제창하자, 곧이은 세대는 교학으로부터 점점 단절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불교 교학뿐만 아니라 선의 생명력까지 고갈시켰다.

적어도 수행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고, 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어떠허게 해야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 가운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서산대사가 "선가귀감"에서 적은 대로, "부처의 마음 禪과 부처의 말 敎는 다르지 않다" 종밀과 지눌은 화엄의 교학으로 선의 실천을 떠받치려 했고, 서산의 문하는 선의 소의 경전으로 "금강경"을 생각하기도 했다. 교와 선은 더이상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

 

p258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점수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 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인생의 문제는 몰록 깨달음 한 번으로 끝장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p260

교학 연구는 훈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료를 정리하고, 경전을 번역하며, 디지털화하여 제공하는 기초작업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위에 이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 팔리어 원전드리 이해되고 해석되어 자신의 언어로 되새김된 뒤, 교통 가능한 현대어로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게 장악된 연구만이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장악되어야 취사가 정해지고 새로운 중심의 형성도 가능하다. 여기서 분야는 계율과 선정, 지혜 모두를 포괄한다. .....

선은 태동 초기부터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왔다. 백장의 일화는 감동적이나. 노구라 무리라고 제자들이 호미를 감추자 자신의 원칙에 따라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그 자립정신이 삼무일종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을 소멸로부터 건져올렸다. 선은 또 출가자와 재가자 사아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선이야말로 불교의 초세간적 가르침을 일상 속에 구현하는 종교적 혁명을 만들어간 것이다.

선에 철저하자면 먹물옷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수행자들이 생활을 통해 자립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타율적 의존도가 클수록 역설적으로 대중과의 연계가 희미해지고, 정재 운영의 효율성이나 투명성도 기하기 어렵다. 살림의 재원은 산중의 물산과 수행 공동체의 울력, 그리고 선의 실천적 수련을 가르치면서 얻어지는 자립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구미에서 선센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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