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도종환 / 좋은생각 / 2008
p27
난필로 어지럽게 남긴 글씨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닌 채 쫓기며 살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반듯하게 생각하고 쓰고 하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p37
외로운 대로 지내지요. 살면서 외로운 시간도 필요해요. 저는 이런 고적한 시간이 내게 온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렇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도 복 받은 거지요
p38
오늘도 그렇게 단순하게 하루가 가고 있습니다. 조촐하게 봄 한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좀 심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거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며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양의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몇 가지씩 일을 하면서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전력투구하여 일을 하고 나서도 시간이 있었으면 더 잘 했을 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소진하는 삶입니다. 있는 걸 모두 써버리는 삶입니다. 바닦까지 긁어내 탕진하는 삶입니다. 정신도 에너지도 아이디어도 체력도 있는 대로 다 써버리고 지쳐 나가 떨어지는 삶입니다. 채우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인 힘이 고이도록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채워지기도 전에 닥닥 긁어 써버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p42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 삶을 바라봅니다. 내실이 없는 허세와 과장이 많았습니다. 평온한 속도를 만나야 합니다. 평온한 속도로 걸어가야 다시 청안해지는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p48
허약한 바탕에 충실한 실행이 없는 채 입으로만 세상을 질타하고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다행이 병을 핑계로 조용히 자성하고 독서하며 지낼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이런 고마운 시간을 슬기롭게 쓰지 못하고 또 여기저기 저잣거리로 불려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금생에서 다시 이런 시간을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고봉 선생도 "기질에 익은 얼룩은 지우기 어렵고, 속세의 얽힘은 너무도 무겁습니다. 인연에 따라 응대하는 사이에 자못 번거로움을 느끼게 되니, 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학문은 날이 갈수록 막힙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렵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다면, 그리고 산에서 받은 좋은 기운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되찾은 몸과 마음의 평화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데 나누어주고자 합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가 꾸던 꿈은 역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삶으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질 받으며 역풍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 없음을 반성합닏. 우리의 입에 발린 말들을 반성합니다.
이제 복사꽃 지고 나면 사과꽃 배꽃이 핍니다. 튼실한 과싱을 지니는 나무들은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모두 소박하고 조촐한 꽃을 피우고는 봄 햇살 아래 조용합니다 조용하지만 봄볕 아래 충만합니다. 이 봄 우리도 그렇게 출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51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져서 괴로움이 생긴 것입니까? 내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생긴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가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자아입니다. ...문제는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자아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아를 다스리는 일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인데 그 과제를 풀어나가는 일이 곧 수행인 것입니다. ...재물도 내게 왔다가는 흘러온 길을 따라 언젠가는 흘러 내려갑니다. 그게 순리입니다. 이름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에 묻혀 천천히 지워지기도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또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사람의 삶의 이치도 자연의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식은 자식의 것이고 아내는 아내의 것이며 나무는 나무의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큰 주인이 우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그것들과 함께 소중한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p60
나는 변두리를 선택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먼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일이 중심으로 들어가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불운이든 불행이든 절망이든 모두 시와 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만 소중한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다 나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말고, 사람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가장 크고 값진 재산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고 사람을 잃으면 가장 큰 것을 잃는 것임을 늘 기억하여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체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능력과 사람됨은 볼 줄 모르고 겉에 드러나는 헛된 이름표와 계급장과 외피로 사람을 판다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p67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것, 내가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 있는 것, 우리 가정이 존재하는 것,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 또한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비교하면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p73
나도 매일 매일의 삶에서 내가 거둔 것에 늘 감사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일한 만큼 거두어가는 삶, 더 많이 쌓아두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땀 흘려 일하되 검소하게 살고, 만족할 줄 알고, 나눌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선량함은 단단한 흙을 뚫고 바위가 갈라진 틈을 지나 자생하는 연약한 식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쐐기도, 어떠한 망치도, 어떠한 무기도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당장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들은 반드시 인정받게 됩니다. 정직하게 노동하는 사람이 바보같이 여겨질 때도 있지만 정직하지 않고 참되게 승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검약하게 욕심없이 사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행복과 기쁨은 그들의 것입니다.
p81
"저는 다음 생에 진실하게 마음 공부하는 스님으로 태어나라고 발원하고 있어요. 수행하는 스님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보낸 후배는 문학청년 시절에도 비구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무욕의 얼굴이었습니다. 작고 맑은 그 얼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갈망은 문학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통해서 채워져야 하는 것들임을 진작 알알어야 한느데 다른 데를 돌아다니며 방황했던 거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방황의 시간과 먼지 많고 뜨겁던 세속의 시간들도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태양아래 서툴기만 하던 삶과 작열하는 번뇌의 날들을 니나 그녀가 선원에서 비로소 진여자성을 만난 것도 여름의 끝에 가을이 기다리고 있는 이치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p85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하루만 더 살기를 간절히 바라던 바로 그날이라고 합니다. 그 생각을 하면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한 시간을 아름답고 쓸모 있게 보내고자 합니다.
올해는 거창한 다짐을 하지 않고자 합니다. 크고 엄청난 것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지 않기로 합니다. 대신 올해부터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미리 나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못 고친 습관 중의 하나가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나가는 버릇입니다....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해 미리 조금만 생각하기로 합니다. 그날 만날 사람에 대해 만나기 전에 잠시만 생각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그 만남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만남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많이 듣고자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대하고자 합니다. 말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하기로 합니다. ...
가진 것을 베푸는 보시는 재물로만 하는게 아닙니다. 재물이 없어도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보시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것도 보시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든 늘 대하던 사람이든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면 그는 행복해합니다. ..눈에 호의를 담고 바라보는 것도 보시입니다. 상대방은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며 동의해주는 눈빛은 상대방과 나를 더 가깝게 해줍니다. ...물으면 친절히 잘 가르쳐 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거창한 것을 이루기 위해 앞에 나서기보다 어느 자리에서건 순간순간의 삶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p91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러 갔다가 친절한 사람을 만났을 때, 친절하고 능력이 있으며, 고마워하는 나보다 더 밝고 환한 얼굴로 서서 인사하는 모습을 대했을 때 기쁨은 오래갑니다. ...자상하게 병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의사의 진지한 눈...장식품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귀여운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산속에 조용히 피어 있는 들꽃 한송이는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p114
남들은 서슴없이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데 나는 그냥 나 하나를 지키고 사는 일도 어려워하며 한세월을 살았습니다. 잘못 살고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p127
사람도 담백한 사람은 편안합니다. 같이 지내개가 부담스럽지 않아 한번 사귀면 오래갑니다. 담백한 맛은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오래 먹어도 싫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p131
사람도 쇠약해질 때 사랑의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존 본능이 그렇게 몸에 작용을 하는 거겠지요.
p133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고 합니다. 봄날 만난 꽃과 나무에 대해 많이 아는 것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아니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꽃과 나무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르고서는 일할 수 없습니다.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아해야 하고 즐겨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p140
나는 텅 비어 있는 날이 좋습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정을 조정해서 하루를 비워둡니다 내가 나를 만나는 일도 중요한 일정립니다. ... 내 안에도 내가 돌보고 배려해야 할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p143
아름다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있고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즐겂브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면 더욱 그렇습니다. ...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가식 없는 사람의 진실한 언행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꾸미고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아닌 순수한 아름다움, 그런 풍경, 그런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박수를 보내고, 아름다움과 하나되어 있고 싶습니다.
p155
조탑리에 있는 선생님의 집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집입니다. 다섯평짜리 흙집. <몽실언니>와 <강아지똥>같은 훌륭한 작품을 쓰신 어린이 문학의 가장 큰 어른은 평생 가장 작고 초라하고 비루한 집에서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큰 집에서 살 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추녀 밑에는 씨앗으로 쓰려고 보관해온 옥수수 여남은 개가 매달려 있었고 평상에는 보리건빵과 뻥튀기 과자 한 봉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맛있는 것, 더 기름진 먹을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
선생님은 혼자 사시는 동안 쥐가 들어와 옷 속에서 잠을 청하면 그냥 거기서 자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혼자 주무시기 무섭지 않느냐고 어린이들이 물으면 오른쪽에는 하나님 왼쪽에는 예수님이 함께 주무시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들도 침을 뱉고 가고 흙덩이조차도 외면하는 강아지똥도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오직 내 자식 내 가족에게만 물려 주려고 끌어안고 있는데 선생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한 줌의 재가 되어 가셨습니다 ...
권정생 선생님, 가장 순결하고 맑고 높은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가장 비천하고 남루하고 외롭고 병든 모습으로 살다 가신 권정생 선생님, 선생님을 생각하면 울음도 눈물도 민망할 뿐입니다.
p161
이 흙의 몸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도 밭을 풀어주고, 잠시도 멈추지 말고 거두어 들이고, 거둔 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도 나를 놓아 줍니다. ...
그렇게 생각이 이어져 나갔습니다. 용타 스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앞에 두고 그렇게 -구나, -겠지, -감사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가지면 평화를 잃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즉 한 순간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괴로운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합니다. 사실을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만도 중요한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
인간은 선하지 않다고 해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백 퍼센트 추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선함,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함과 거짓됨, 탐욕스러움과 비운 마음,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함께 지니고 삽니다. 이 중에 어느 쪽이 더 많고 다른 쪽이 적은 것입니다. 성인도 이 중에 선한 마음만을 지니고 있고 다른 마음은 없는 게 아니라 바르지 못하고 어리석고 모진 마음이 남아 있으나 그것이 순화되고 최소화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우리가 노력한 만큼 그쪽으로 깊게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p173
사람과 같은 도시에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일사불란한 지휘통제를 따라 한 손에는 경전, 다른 한손에는 무기를 든 채 잠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계율과 법칙이 있고 도처에 원수가 숨어 있으며 대립과 경쟁과 싸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숲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뺏고 뺏앗기고 지배하고 짓밟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어 함께 공존하는 일체감과 원융합일의 세계가 있습니다. ...
천지의 만물 하나도 소중한 생명이요 작은 우주가 거기 깃들어 있는 것이므로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람도 그렇다면 사람의 생명이야 얼마나 더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경인해야 합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하늘을 공경해야 합니다. ...
줄탁동시. 나도 힘차게 내 껍질을 깨고 일어서야 합니다. 천지가 이미 자기 껍질을 깨고 나온 것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p180
지금 이 농사는 주는 농사입니다. 우리 먹고 남는 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짓는 농사입니다. 좀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농사를 지어서 먹을거리를 해결하려는 목적과 함께 병든 몸과 망므을 다스리려는 뜻도 있습니다. 생계수단으로 농사를 짓는 이 동네 사람들도 웬만하면 그냥 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우리가 너희에게 이렇게 베풀었으니 너희도 주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냐고 요구하는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마나는 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 마음 씀씀이, 사심 없이 베푸는 삶의 태도를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도시에서 경계하고 의심하며 살던 삶이 태도가 저절로 무장해제되는 것을 느낍니다. ...
베풀고 난 뒤 마음이 기뻤으면 그것으로 이미 받을 만한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욕망에 따라 행동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행동은 금방 손가락질합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었으면 남들도 분명히 그럴 겁니다. ....
남이 내게 베푼 것은 고마워하되 내가 베푼 것은 잊어저리고 오래 기억하지 않는 삶, 나의 잘못은 엄격하되 타인의 잘못은 관용하는 태도, 내 욕망은 다스리고 절제하지만 남의 욕망은 이해하는 마음,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되 내 신념이 남에게 무기처럼 강요되지는 않는 세계관, 남이 인정받는 것은 기뻐하지만 내가 인정받지 못한 것을 서운해하지 않는 마음, 내가 불행을 겪을 때는 인과를 살피면서 참회하지만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같이 아파하는 마음, 있는 것을 너무 드러내려고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닌 삶. 용타 스님은 이런 삶의 태도의 바탕이 되는 것을 양중의 원리라고 합니다. ...
옳은 것은 옳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조급한 게 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양중의 원리 속에는 여유와 넉넉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양보가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텅 빈 마음이 있어서 늘 새롭게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나는 텃밭에 짓는 이 농사가 그저 주는 농사, 베푸는 농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맛있게 먹이고 돌아가는 길에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내줄 수 있는 기쁨을 생각하며 채소를 키우고 풀을 뽑을 것입니다. 이 농사는 내게 호사스러운 농사이면서 고마운 농사입니다.
p190
나무는 이파리뿐만이 아니라 가지나 줄기를 잘라주어도 살아 있습니다. 아니 고목으로 서 있다가 태풍에 쓰러져도 벌레와 곤충과 새들에게 자신의 몸을 통째로 내어줍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다가 갈 수 있으면 좋겠ㅅ브니다. 자신의 일부를 다른 것들을 위해서 내어주면서도 기쁘고 푸르고 울창하게 살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p192
죽어 흙에 묻히고 나면 사람일지라도 지금 살아 있는 꽃 한 송이만 못합니다. 우리도 시들어 떨어지기 전까지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디 아름답기를 소망합니다. ...주어진 기간 동안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를 기분 좋게 가슴 뿌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행복하게 , 아름답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
사람들에게 얼마 정도의 돈이 필요하냐고 물으면 조금더 필요하다고 합니다....조금더 그렇지요, 조금 더 필요합니다....그러면 순간순간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적은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그날 그날이 행복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 상태로도 만족하라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영혼이 나와 함께 하는 동안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 영혼이 늘 나와 함께 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그 영혼이 나를 떠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이 함께 하는 동안 그 영혼이 가리키는 길을 가십이오. 그게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삶을 주신 것입니다. 은전 몇 푼에 영혼을 팔지 마십시오. 악마는 그걸 사려고 늘 당신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헛된 명예와 이름을 얻으려고 당신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키워온 의로운 마음을 야차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마구니들은 없습니다. 당장은 내가 이익을 얻는 것 같아도 오늘 그들에게 팔아치운 의로운 마음 때문에 오래오래 괴로워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십시오. 이 하루를 사무치게 사십시오. 물 한 모금 앞에서도 솔직하게 사십시오. 햇볕 한 줌 앞에서도 모래 한 알 앞에서도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러려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것입니다.
p198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 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책꽂이를 치우며>
p200
너무 많은 것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것보다 적더라도 꼭 필요한 것을 제대로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많이 읽고 아는 것만큼 마음이 그렇게 깊고 맑게 바뀌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실천하며 사는 일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p202
선의로 시작한 일도 악업을 지으며 끝나는 경우가 있는 걸 또 확인해야 했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바로잡는 다는 일이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번 더 뼈져리게 경험하였습니다. 세상은 의로움이나 진정성, 새로움 이런 것만으로 방향을 틀기엔 이미 이해관계와 인적, 물적 그물망 등으로 너무나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곳입니다. 참신한 사업을 시도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지만 사람에 대한 실망은 더 컸습니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쉬움이나 실망이 아니라 사실을 사살대로 말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 놓인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쏟아내는 비방과 모략과 책임 떠넘기기와 자기합리화, 이런 방어행동들을 지켜보는 과정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칼이 되어 나를 찌르는 그런 행동을 가슴에 쌓아두지 말고 녹이고 용서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다독이는 일이었습니다.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미움을 삭이며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용서보다는 미움이 더 큰 상태에서 그렇게 마음을 바꾸어 가지게 된 계기는 우연한 데서 왔습니다.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인이 내가 부탁한 시 원고를 보내며 거기에 첨부해서 보낸 글을 읽은게 마음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
"대인은 모든 사람에게 늘 사과하고 용서하기를 좋아해서 바보 같아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천하 사람들이 모여 떠받들고 그덕택으로 성군이 된다. 소인은 남의 단점을 보고도 말하지 않으면 양심부재라 하고 이를 깨우쳐준답시고 나서지만, 주변 사람들은 따지길 좋아하는 그에게서 모두 떠난다. 게다가 자기는 남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원망하며 산다. ....
남을 미워하고 대립해 있는 기간 동안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를 생각해보았더니 그건 그들이 분명 잘못했다고 믿고 있는데 비난은 내가 받고 있다는 것과 그런 그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한테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나는 용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오현 스님은 '원망을 낳지 않는 사랑법'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지난 몇 달간 욕도 많이 먹고 비난도 많이 받고 오해와 모함과 중상과 질시도 숱하게 받았지만 소인이되지 않는 버과 원망을 낳지 않는 사랑법 이 두가지 가르침을 받기 위한 시련의 날들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p210
'말을 조금 덜 하고 더 많이 들을 수는 없었을까. 친구의 말이 틀리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나와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내 말에 대해 공격을 한다고 생각하여 경색되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대할 수는 없었을까. 상기된 얼굴, 따질 듯한 표정으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친구도 얼굴이 굳어졌던 건 아닐까. 친구가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말을 하게 된 것은 혹시 내가 한 말 중에 나도 모르게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린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힘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를 많이 낸다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있으면 분노하지 않습니다. 강한 자일수록 여유가 있습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하고 분노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
p217
낯선 사람에게서 귤을 받아든 이 아이는 천천히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신기하게도 아이는 거기서 울음을 그쳤습니다. 무언가 울음을 통해서 제 답답한 상태를 호소하고 싶었던 아이는 낯모르는 사람의 호의에 그만 가슴속에 막혀 있던 불만족스러운 그 어떤 것 하나가 풀어진 것 같았습니다. ...
아름다운 사람은 순간순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신해야 하는가를 압니다. 작은 일 하나로도 스스로 행복해지고 남에게 고마운 사람이 된다는 걸 압니다.
p224
남이 아파할 때 나는 같이 아파하거나 공감하지 않고 내가 아플 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것만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참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내 가족들에게도 그러하였으니 이웃들에게는 더 하였을 것입니다. 남이 받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나누려 했는지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늘 내 처지에 서서 바라보고 그 일이 나하고 이해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계산해보다가 돌아서는 날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p231
밥 한 그릇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을 수 있으면 그것이 성찬입니다. ....
그런 생각을 하며 빵 한조각 앞에서도 밥 한 그릇 앞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시래깃국 한 그릇 앞에 놓고 잠시 묵상하며 겸허해지고자 합니다. 죽 한 그릇 앞에서 이것을 먹어도 될 만큼 오늘 하루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사물을 존중하고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p256
서로 다른 빛깔이 어울려 내가 돋보이고 나로 인해 다른 빛이 드러나 보이는 그런 삶이 아름답습니다.조화의 빛은 공생의 빛입니다. 상생과 공존의 빛입니다. 서로 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다채롭고 풍요로운 것입니다 나와 다른 빛깔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알아가야 할 영역이 있는 것이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풀어나가야 할 미완의 과제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제를 해결해가며 역사는 진보하는 것입니다.
p258
줄 하나하나가 같지 않으믕로 하여 어울려 나오는 조화로운 소리. 그렇게 이루는 화음은 오묘합니다. 굵기도 다르고 길이도 다르고 높이도 달라 음악이 되는 이치를 가야금은 가르쳐줍니다. 소리의 높낮이도 없고 길고 짧음도 없이 똑같았다면 아름다운 소리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소리입니다.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상태를 화이부동이라고 합니다. 제 소리와 다른 소리가 어울리면서 서로를 살리는 소리입니다. 한 소리가 다른 소리를 지배하지 않고 작은 소리가 큰 소리를 따라다니며 제 소리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낼 수 있는 게 악기 소리입니다. 소리마다 제 음을 지니면서 뇌동부화하지 않아야 유려한 음악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p264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단풍드는 날 >중에서 ....
나무는 무너지는 푸른빛을 거두어들이며 붉은빛을 꺼내 놓습니다. 이것도 나뭇잎 안에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나뭇잎 안에도 강렬함과 온유함, 열정과 냉정, 정과 동, 평온한 빛과 치열한 자기 색깔이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푸른빛을 붉은빛이나 노란빛으로 변화시키는게 아니라 푸른빛이 무너지자 붉은빛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
나누는 것보다 더 풍요로운 삶은 없다는 것을 식물도 동물도 본능적으로 아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쌓아놓기만 하려는 삶은 그래서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경제적인 가치로 바꾸어버리고 경제적인 논리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이 순리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단풍든 나뭇잎이 바람에 몸을 씻으며 내는 소리는 그걸 알아들으라는 자연의 음성입니다.
p273
어떤 싸움이든 싸움은 상대방만 다치고 나는 온전한 경우가 없습니다. 서로 크고 작은 상처가 나게 마련입니다. ...파스칼은 "몸이 굽으니까 그림자도 굽는다. 어찌 그림자가 굽은 것을 한탄할 것인가"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 마음이 불행을 만드는 것처럼 불행이 내 자신을 만들 뿐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르리지 못해 불행을 자초하면 그 불행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
인생의 고통은 소금과 같다네. 하지만 짠맛의 정도는 고통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지. 잔이 되는 걸 멈추고 스스로 호수가 되게나.
큰스님의 말씀처럼 고통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물잔만 하면 늘 얼굴을 찡그리고 살게 됩니다. ....마음을 크게 쓰는 훈련이 수양이며 극기입니다. 배움이나 기도나 성찰이라는 것이 다 물빛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p286
사랑한다는 것은 조금 더 믿고 기다려주는 일인지 모릅니다.
p293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을 내 손으로 지어먹으며 나는 새로운 삶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검소하고 간결한 삶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엇습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자신이 서서히 해체되고 새롭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던 자아가 조금씩 지워지고 작업복 바지 하나로도 편안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던 것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새로운 삶의 주체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느닷없는 기쁨', '생명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이란 신체에 내재하면서 신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생명은 신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신체의 일부이지만 신체라는 틀을 뛰어넘어 먼 밤하늘로 넘어가려고 한다. 생명이란 신체를 넘어서려고 하는 신체다. 그때마다 생명의 힘은 신체의 틀을 안에서부터 바꾸어놓고, 그때문에 예기치 않은 생명의 기쁨이 나타난다. 생명의 기쁨은 내가 얻으려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고통과 직면해서 나를 바꿔가는 중에 '예기치 않은 형태'로 나에게 다가온다"
...신체의 욕망에 갇힌 채 새로우면서도 쾌락적인 것, 자극적이면서도 크고 많은 어떤 것을 찾아가다가 만나는 흡족함과 이 기쁨은 다릅니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육신이 본능적으로 움직여가는 길과 생명의 길은 다릅니다. 이 기쁨은 고통 속에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고통을 만나 그 고통 속에서 나를 해체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며, 땀을 흘려 일을 하며, 험한 길을 걸으며, 내 하루치의 목숨에 대해 뼈져리게 생각하며 내 삶의 주체를 바꿔가는 동안 내게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겨울 찬바람에 감사합니다. 눈 녹은 물을 얼게 하고 고드름으로 벌을 세우며 채찍질하는 혹독한 밤공기에 감사합니다. 방 안의 물까지 얼려버리고 손을 갈라 터지게 만드는 냉기에 감사합니다. 나를 언제든지 더 험한 벌판으로 내팽개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겨울에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지금까지 누리던 편안함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라. 거기 불안과 함께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시련의 계절에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다시 감사하며 차가운 새벽빛에 이마를 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