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오강남, 성해영 대담집/ 북성재 / 2011
p32
결국 종교체험의 하나인 신비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동양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면, 모든 인간은 이런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옛 상태에서 탈피해 더 깊은 차원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또 궁극적인 실재를 접해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해방되어 참자유를 누리는 새 사람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점에서 신비체험은 인식의 변혁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 즉 우리의 전존재를 뒤흔들고 뒤바꾸는 체험입니다. 루돌프 오토가 말한 정말 떨리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신비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겠지요. 거듭 얘기합니다만, 이 세상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근본 실재인 궁극적 실재를 내면 깊은 곳에서 직접 체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요. 내 얘기는 다만 종교의 핵심이란 다름 아닌 '궁극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피력하는 겁니다.
p38
표층종교가 가지는 특색 몇 가지를 살펴볼까요. 첫재,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적입니다. 즉, 문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합니다. 둘재, 모든 것을 지금이 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한 것이라는 식이지요. 여기에는 단순히 지금 잘되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야 한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표층종교란 몸나, 제나를 어떻게라도 확대하고 꾸미고 연장하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종교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차원의 종교는 문자를 넘어서 있는 더 깊은 뜻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글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문자를 통해 문자가 가리키는 그 너머의 것을 보려고 합니다. 더욱이 심층종교는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참나, 큰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 얼나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신성 혹은 불성, 인성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절대자 속에 있고, 절대자가 내 속에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의 심층적 차원을 종교학에서 비교적 차원으로 보고, 표층적인 현교적 차원과 대배시키기도 합니다.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표층으로 시작하지마나 자라가면서 결국은 심층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겠지요.
p40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 류영모는 종교의 핵심은 모믕로서의 나인 '몸나'에서, 그리고 탐욕과 미움과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에 찌든 자아 인 제나에서 해방되어 참나, 큰나, 신적인 나인 얼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p44
반면에 심층종교에서는 똑같은 헌금이나 나눔의 행위라도 그것을 욕심으로 가득 찬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나를 찾아가는 훈련과정의 하나로서 보는 겁니다. 투자한 것에 보답 받으려는 태도와는 다르죠...
예컨대 선행의 심층적 동기는 궁극적 실재와 하나 된다는 것과 떨어질 수 없을 겁니다. 즉 자기가 잘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팔과 다리가 언뜻 보면 서로 떨어진 다른 것들로 보이지만, 큰 차원에서는 한몸이고 서로 도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에 입각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에도 나오는 '가장 못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곧 하느님께 베푸는 일' 이라는 이야기 역시 이 관점에서 설 때에만 온전하게 이해 될 겁니다....
제일 중요한 진실은 모든 게 '하나'라는 것입니다. 상호 연관 혹은 상호 의존성이 제가 본 모든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제가 본 모든 중요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 그렇습니다. 만유일체, 혼연동체라는 거죠. 우리는 기를 공유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픈데 어떻게 나만 안 아플 수 있겠습니까? 고통을 뜻하는 패션passion에 함께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컴패션compassion 즉 자비가 됩니다. 컴패션은 함께 아파한다라는 뜻입니다. 이걸 보면 도덕적 행위는 인위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심층 차원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저절로 나타나는 자연스런 행동인 셈이지요. 그것이 바로 순리입니다.
결국 도덕의 완성은 종교적인 완성이 있은 다음에야 가능합니다. 물론 심층으로 가는 데에는 먼저 도덕적인 훈련이 불가결합니다. 나의 욕심을 없애고, 나누는 태도를 비롯해 남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심성이 있어야 하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나를 없애야지만 비로소 심층의 차원에 이를 수 있고, 종교의 본래 의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나를 버린다는 것, 즉 무아의 가르침은 출발이면서 동시에 목적입니다.
p65
결국 현대에 특정한 종교가 그 전통에 속한 신도들에게 그들의 영성이 다양한 형태로 발달 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못한다면 종교로서 존속하기가 힘들 겁니다.
p75
서양에서는 신비주의의 길 이라는 것이 있어요.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 첫째는 자의식으로서,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왜 이런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깨달아 갑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의 모자람을 없애려는 정화purification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없애고 사랑을 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이지요. 그런 연후에 이른바 빛을 보는 조명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를 통해 내면적 통찰과 직관이 가능해지는 깨침이지요.
마지막에 가서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입니다. 라틴어로 unio mystica라고 합니다. 온 세계와의 합일, 모든 만물과의 합일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남도 없는, 주객이 일치하는, 주객을 넘어서는 단계이지요...이처럼 신비주의의 길은 동서양이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노자나 장자, 붓다나 예수도 하나 됨을 얘기하고 있죠.
p79
에크하르트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신성godhead과 신god의 개념을 구분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신비적 하나 됨의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완전한 신의 초월성과 자족성을 신성의 개념으로, 그 이전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관계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을 신으로 개념화했지요. 이런 시각에서 에크하르트는 신비적 결합을 위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신을 지워내기를 갈구했습니다. 그 점에서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도무지 넘기 힘든 이원성을 상정하는 통상적인 기독교 신학을 넘어섰지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에크하르트가 기술하고 있는 신성의 특성이 불교의 공空 개념과도 매우 흡사해 보여, 그를 익명의 불교도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죠. 물론 집어보자면 불교에도 혹은 힌두교에도 익명의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겠지만요.
p80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을 비롯해 그의 저작들은 매우 유명하지요. 특히 그는 인세를 소유하려하지 않았고, 다양한 동서양의 영적 지도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할때 회개는 원문에 메타노니아metanoia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의식의 변환' 곧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이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아울러 모든 종교 역시 무언가 색다르고 특별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비와 같은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심층으로 가는 과정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점은 아무리 얘기해도 모자랄 겁니다.
p90
또 심층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지만, 잘 따져보면 심층적인 차원을 드러내는 것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동방 정교회의 '예수기도'가 대표적입니다. 반복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르 베푸소서"하는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 외우는 수행법인데요. 하루에 3천번, 그러다가 6천번, 나중에는 1만 2천번 반복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기도가 속에서부터 자동적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계속 그것을 외다 보면 자기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 과정에서 절대자와의 합일체험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을 계속하다 보면 의식의 집중과 더불어 내면적 변화가 생겨나게 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바로 염불선이지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표층인지 심층인지를 쉽게 얘기할 수 있는게 아니고, 수행이 동기나 의도에 따라 그 영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원리에서 3천 배도 계속하다 보면 자기가 없어지고 절대적인 존재와 하나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제대로 된 수행법을 찾아 넘어가는 것보다는 자기가 속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가 문제일 겁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 참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p92
한가지 덧붙이자면 보통은 표층이 다수고 심층이 소수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듯이 예수기도나 염불선 같은 수행 전통들은 표층이 곧바로 심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수행법들은 심층종교가 지니기 쉬운 엘리트주의를 보완하고 견제하려는 움직임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또 소수에게만 가능한 지성적 완성을 '사랑'과 같은 정서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보완하려는 시도이긷 하구요. 물론 이런 대중적인 수행법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며 지성적인 정화라는 면에서는 약점을 지니기도 합니다. 또 사회적으로 왜곡되거나 악용될 위험성도 다분하구요.
p95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얘기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앞서 소개했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khart)입니다. 그에 따르면 신은 존재의 근거, 독일어로 Ungrund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현대 신학자중에서 가장 잘 수용한 사람이 폴 틸리히(Paul Tillich)입니다. 그는 신을 존재의 바탕이라고 했지요.
보통 신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신을 존재 being로 생각한다면 그 존재가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 같은 레벨에 속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시공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절대적이지 못하지요. 따라서 심층종교에서는 신을 존재라 하지 않고 오히려 비존재라고 non-being해요. 다른 존재와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라는 뜻이지요. 도가에서는 없음無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빔空이라 이야기하구요.
다석 류영모 선생님은 이런 궁극실재를 두고 '없이 계시는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진공묘유의 우리말 표현입니다. 결국 이처럼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표현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종교의 상징에서 나타난 대극의 통합을 조금 더 살펴보면, 음양으로 구성된 태극의 상징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는 보통 예수의 고난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근원적 의미는 두가지 대극적 원리의 조화입니다. 수평과 수직의 통합이지요. ...불교의 만자도 그렇습니다.
p97
체험이나 수행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일상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정화와 철학적 정화가 신비체험을 위한 수행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지적합니다. 덧붙여 학자들은 수행 그 자체가 종교체험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또 마음을 비움으로써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마음 비우는 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비우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역설 위에 수행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연구에 의하면 인간을 방심의 상태에 도달하게 만드는 요인에는 종교적 명상 외에도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 이른바 총알을 나아가게 하는 방아쇠와 같다고 해서 방아쇠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약물, 출산경험, 단식, 노래, 여러가지 과도한 오감의 자극, 술, 마약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 모두가 항상 의식을 변형하거나, 그 변형의 결과로서 종교적 통찰에 이르게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방아쇠 자체가 총알인 것은 아니니까요.
p100
결국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한 가지 방법이 유일하게 유효한 것도 아니고, 그 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종교체험 역시 단일한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의식의 변화를 깨침과 꺠달음으로 구분하긷 합니다. 깨달음을 단계적이고, 깨침은 항아리가 깨어지듯 팡! 하고 터지는 것을 말한다는 거지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는 저는 양자를 꼭 구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리려 종교적인 삶을 등산에 비교하기를 즐깁니다....
p102
어쨌든 다섯 번째 방을 통과한 인간의 영혼은 다시 여섯 번째 단계인 이른바 '영혼의 어두운 밤'으로 돌아옵니다. 인간 영혼이 왜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이 지상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냐고 탄식한다는 점에서 이 단계는 인간적인 고뇌와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이 혼란의 상태를 거친 후에야 인간 영혼은 마침내 일곱 번째이자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 단계는 다섯 번째 맛보았던 신적인 기쁨의 상태를 타인들과의 관계속에서 구현하는 인간 영혼이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데레사는 돈오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닦아야 하고, 인간에게는 그 닦음이라는 게 무한에 가까운 일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결국 제 생각에는 심층종교들을 서로 같다. 다르다는 관점에서 논의하기 보다는 서로 통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p104
봉사, 자비, 사랑과 같은 윤리적인 덕목은 신비적 합일체험곽 타은 예외적인 사건과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으로 신비체험의 이전과 이후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됩니다. 즉 윤리적 행위는 신비적 합일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고, 체험 이후에 등장하는 종교적 믿음의 열매일 수 있다는 거죠. 그 점에서 윤리적 측면은 종교의 심층차원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동양의 구루로 일컬러지던 깨달은 종교 지도자들이 미국과 같은 서양 사회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해서는 종교학자 내부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타인의 동의가 없을 때에는 깨달음이나 영적인 진보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어떤 행위를 강제하는 것은 문제라는 점은 최소한 받아들여야겠지요....즉 비범한 종교경험이 곧 바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높은 윤리 의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종교경험으로 인해 더 비윤리적이 될 위험도 있다는 것이지요. 종교경험에 대한 연구는 이 점을 우리에게 더 경계하도록 만들어줍니다.
p108
안회가 자기에게 무엇이 모자라기에 못 가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굶으라고 합니다. 안회는 자기 집이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 하는데, 굶는 것이 자격이라면 자기에겐 자격이 차고 넘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런 육신적, 제의적 굶음이 아니라 '마음 굶김, 심재 心齋 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비우고 오로지 남을 위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남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 희생 없이 자기의 허영이나 욕심을 위해 사회참여니 하면서 부산을 떨 경우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자기를 완전히 비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상을 염두에 두고 사회참여를 하는 것은 심층종교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훈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지요. 어느 쪽으로 보든 자기 비움이라고 하는 심층종교의 이상이 빠져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p110
닐스 페레라는 종교학자는 "나는 기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는 것인 종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란 뜻입니다. 기도 없는 종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지요....긷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비는기도, 감사의기도, 관상기도도 있구요. 우리가 익히 아는 무언가를 비는 기도는 다른 말로 청원기도 인데여, 표층종교는 청원기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Kierkegaard)라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p112
에리히 프롬 같은 심리학자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우주 공간을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 내 속의 내면 공간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라는 말은 곧 명상의 중요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미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그 나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p113
우선 첫 부분은 특정한 소리나 영상에 대한 집중을 통해 이처럼 우리 의식을 한 군데로 모으는 겁니다. 계속되는 수련을 통해 이처럼 집중의 능력이 커지면, 그 다음은 이른바 '비움'의 능력을 키워 의식의 내용물, 나아가 내 자신을 없애는 역설적인 노력을 합니다. 이렇게 의식 속에서 사고와 같은 의식적 작용이 비워진 집중의 상태가 되면, 여기에서 의식의 심층적 차원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에서 다양한 통찰과 영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여러 종교의 수행이 지향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14
기도_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의 기도..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을 알려진 책.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순례의 길을 떠나 큰 스승으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기도를 하루에 1만 2천번 이상 반복하는 예수기도를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기쁨과 평화, 나아가 하느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한다....
21세기 영성 혹은 심층종교는 한마디로 기도와 명상을 되찾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서양에 가보면 젊은 사람들이 선불교나 티베트 불교의 명상 센터, 틱낫한 스님의 명상 센터, 위파사나 명상 센터 등에 많이들 몰려 있어요. 우리 역시 명상의 중요성을 시급하게 재발견해야 할 겁니다.
p138
궁극적으로 경전을 읽을때에는 그 읽음으로 인해 나와 하느님이 하나 되는 신비적 체험을 유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식독법을 소드sod 독법이라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선불교와 같은 전통에서는 경전의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읽는 이들의 깨침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불립문자라고 항 경전의 문자적 뜻에 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거죠. 그렇게 때문에 손가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리켜지는 달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심층종교 혹은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은 모두 이점을 강조합니다. ...경전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그 말에 담긴 속내를 궁구해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렇게 했다. 그러나 나는'하는 식으로 성경을 읽었는데, 이처럼 경전을 자기의 실존적 상황에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극이나 일깨움을 얻는 것, 이것이 제가 말하는 환기적 독법이라는 것입니다.
p154
예를 들어 다석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은 <도마복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삶은 놀이라는 이야기는 양자의 유사성을 잘 보여줍니다. 다석 선생님은 "잠을 자고 일어나고 깨어 활동하는 것을 죄다 놀이로 볼 수 있다...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을 지나가면 말끔히 놀이가 될 수 있다"라거나 "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 데로 날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p160
지성의 끝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성을 조금만 사용해도 사랑의 하느님이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내버려두고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만 골라서 고쳐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하느님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되었다면 저는 그런 신앙이 오히려 지성의 퇴행이나 지성의 포기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p161
표층에서 심층으로 깊어질 때 종교적인 열정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이 지성에 의해서 보완되고 균형 잡혀야지 더 깊은 신앙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성을 말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앎'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고 본다면, 그 힘은 단순히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이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을 함께 아우르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 교와 선이 일견 갈등하는 것 같지만, 많은 고승들이 궁극적으로는 교선일치를 강조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의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같은 사람을 "우리가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마음으로 예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무조건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경욱 있는데, 성경에도 보면 하느님이 우리보고 "변론하자"고 초청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걸 영어로 표현하면 'Let's reason" 입니다. 이성을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데 왜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었겠어요? 이성을 최고로 발현해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그걸 넘어서라는 거죠....
칸트는 현상세계와 본질세계를 구별하고 현상세계에서는 인과율 같은 이성적 원칙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본질의 세계는 그런 것을 초월하는 세계이므로 이성에 기반한 노증 같은 것이 적용될 수 없다고 했지요. 이성을 막무가내로 부정하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성에 무조건 의지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p164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이론적 표현은 진리체험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이 진리 자체는 아니지요. 아퀴나스는 신비체험을 가진 후에 자신이 저술한 모든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남깁니다. 토머스 머튼 역시 기독교가 '말씀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종교가 아닐까 이야기합니다. 이 분으로부터 제가 배운 점은 종교는 체험experience이지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설명을 잘하고 설명을 잘 받아들이면 그것을 신앙이 깊은 것으로 보는데 저로선 동의하기가 힘들죠.
p172
그 점에서 개인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뉴에이지 운동은 그 나름의 장점과 필요성이 있지만, 지나치게 극단화 될 경우 사회적, 집단적 차원을 도외시해, 영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떄문에 균형점을 꼭 찾아야 할 것같습니다. 이 점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충분히 확보하되, 제도가 갖는 장점 역시 가급적이면 잘 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p175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철회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심층종교 역시 인간 지성의 한계를 실감하라고 강조하지요...직접 가보고 체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거죠.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심층종교인들은 역설합니다. 열려 있기 위해서는 문자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교리나 문자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특히 문자로 기록된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남이 했던 경험과 앎을 적어놓은 것이므로, 그 기록된 문자 이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앎을 직접 체득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종교생활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말을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는 말에 입각해 해석하자면, 경전에 나타난 사건들을 진실 그 자체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참된 의미, 예컨대 내적 변화나 사랑의 정신과 같은 것을 개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구현하라는 뜻일 겁니다.
p177
또 강조하고 싶은 점은 심층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대부분의 경우 종교적으로 나태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심층종교로 발전하는 첫걸음은 우선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그후에 이 말씀을 궁구함으로써 깨달음이 옵니다. 그 다음에는 깨달음의 열매를 타인과 나누려는 결의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일련의 영적 단계를 '보살의 길'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노력 없이 심층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
그렇다고 그 노력이 억지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할 것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도 자꾸 즐기다 보면 어떤 경지에 자연스럽게 오르고, 간장이나 치즈와 같은 발효식품이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숙성되어 더 깊은 맛을 내듯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종교의 깊이를 더할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에 가장 빨리 도달하려는 욕심때문에 수행을 과도하게 하는 태도는 억지스러운 것이고, 본말이 전도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표층에서 심층으로 가는 과정 자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며, 또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점에서 보면 천국이나 깨달음 같은 목적만을 강조하는 종교생활 역시 또 다른 이분법적인 사고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빠르게 가는 것보다는 즐겁고 행복하게 가는 것이 더 중요하겟지요. 말하고 보니 요즈음 시대에 현저하게 뒤처진 얘기로 들립니다만....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준비과정을 포함해 올라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신이 나는 길이겠죠. 이처럼 종교의 길은 희생의 길이 아니라 걸어가는 자체가 즐거움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종교가 신이 나는 거예요. 무얼 꼭 하라고 명령을 받고, 안 하면 벌을 받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삶이 종교적 삶이라면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어요. 종교적인 삶도 결국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어야합니다. 무슨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종교적 삶도 신이 나야 합니다. '너 이거 안하면 지옥간다'고 하면 당연히 억압이고 고통이죠. 그러니까 심층종교는 종교를 신나는 종교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상벌에 관계없이 자기의 수행이 나날이 깊어져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발견하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리고 그 여정 끝에서 자연스럽게 참나를 발견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면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까요?
p179
종교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종교가 너무 심각해졌다는 겁니다.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 종교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죄와 벌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진지하고 강박적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입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즐겁고 기쁘게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 심하게 매달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이런 것들은 일종의 강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강방적 행위 속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구요. 또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들은 그릇된 자만심이나 우월감의 근거가 되기 십상일 겁니다. 요컨대 신이나 궁극적 실재를 찾아가는 과정에는 웃음이 넘쳐야 한다는 거지요.
선생님께서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점이지만, 표층에서 심층으로 깊어지는 것은 모든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발전을 막을 수도 없겠지만, 동시에 발전하도록 강제하거나 강요할 수도 없겠지요. 인간의 성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역시 자연스러워야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사이즈의 옷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에게 입히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사람이 표층적 차원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겁니다. 그건 종교적, 영적 폭력이겠지요. 타인의 자신을 특별히 해치치 않는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타인의 자유를 충분히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가 보다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결국 지옥 가지 않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는 식의 부정적인 접근 보다는 자신 속의 좋은 것을 키워나가고 그것들을 타인과 나누는 기쁨을 크게 만들겠다는 식의 긍정적인 태도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심층적 차원으로 하루속히 가야 한다거나 꺠달음을 남보다 빨리 얻어야 한다는 욕심이야말로 종교인들이 비판하는 세속적 욕망보다도 더 큰 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180
최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생태계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는데, 세계를 하나로, 하나의 얼개로 보는 심층종교에서는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풀뿌리, 나무뿌리 하나, 개미 같은 곤충이나 사슴 같은 동물 등에 대한 관심도 저절로 생깁니다....같은 맥락에서 <도덕경>이 에코페미니즘의 바이블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거기에서도 모든 것은 하나라는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을 억지로 하지 말고 순리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라는 말은 에코페미니즘의 주장과 다르지 않지요.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개별적으로 봅니다. A, B, C가 각각이고, A와 B와 C는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거지요. 이것이 상식의 세계이자 표층의 세계죠. 그러나 심층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이 점을 가장 강조하는 종교가 불교의 화엄종이에요. 화엄에서는 상즉상입 相卽相入이라고 합니다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상호 침투하고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인드라망 indra's net의 비유죠. 종이가 종이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종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니 그 안에는 비나 구름이나 햇볕 등 나무를 비롯해 나무를 만들어낸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셈이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사물 중 어떤 것도 나와 분리된 별개의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이웃도 나와 별개가 아니고, 자연도 나의 일부라면 함부로 훼손하기 힘들어집니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데에는 생존, 도덕, 생물학적 입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뿌리 내린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렇지만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심층적 차원의 주장을 강조할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 됨의 논리가 전체주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하나 만을 강조하는 태도가 자칫 전체를 위해서 개별 요소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오해되면, 개인 혹은 개체가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인정하되, 각자의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발전시켜, 전체로서 화합하는 것이 추구되어야겠지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해야 할까요. 전체로서는 조화롭게 하나가 되지만, 각자의 특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 말입니다.
p185
결국 이문제는 다시 적절한 균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어질 듯 싶습니다. 동물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식물만을 먹겠다면 식물은 과연 생명이 아닌가라는 질문도 제기 될 수 있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차라리 인간들이 안 태어나는 게 환경에 가장 보탬이 될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수 있겠지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정말로 중요한 점은 무얼 막는가가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불가피하게 먹을 때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이라 봅니다. 동학에서 주장하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以天食天 이천식천이라는 말처럼, 생존 때문에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의 태도가 꼭 필요할 겁니다.
어쨌든 심층적 차원으로 갈수록 분리에 입각한 우월성이 아닌 서로 다른 것들이 개별성을 유지한 채 균형 있는 통합을 이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만물이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채식, 육식을 넘어선 가장 중요한 점이겠지요.
p190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단어가 갖는 본래 의미는 희랍어로 보면 '새로운 세대의 삶'입니다. 어느면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옆으로 계속 뻗어가며 살려는 마음을 끊고 위로 새로운 삶을 찾아 솟아오름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요...
달리 표현하자만 분리된 것들이 온전함과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심층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일 것 같습니다. 또 구원이란 이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체험을 통해 신과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는 사건이겠지요. ....
구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 보는 것이 상당수 심층종교인들의 견해입니다....
함부로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기적인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장되는 것이 참된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이 점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는 개벽된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은 이 대담이 다루고 있는 심층종교의 특성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한가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대의에 지나치게 매달려, 자칫 타인의 자율성을 무시한 채 종교적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 말이죠. 즉 내가 느끼는 기쁨을 당신도 맛보면 좋겠다는 의도는 좋은 겻일 수 있지만, 현실에 적용할 때에는 대단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나만이 참된 기쁨을 알고 있다는 오만과 우월감에 빠지기 쉽고 자칫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데 왜 내 충고를 안 받아들여"라는 독선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도 크고요. ....
자기 입에 맞는 음식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좋은 음식을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하는 것은 안 되겠지요....
"이 가르침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끝없는 괴로움을 겪게 될 거다"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내세워 종교를 전파하는 행위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기쁨을 전면에 내세워 전도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하물며 두려움과 공포를 무기로 삼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강압적인 태도일 가능성이 큰 거죠....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과신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우월감으로 변질 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심층종교는 기본적으로 경전의 이해가 끊임없이 깊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완결된 수준의 경전 이해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기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현재 시점의 이해를 최종적이고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한마디로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진리에 대한 확신은 겸손이라는 덕목과 상충하기 쉽지요.
결국 우리 모두가 종교를 선택하는 일을 비롯해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자신의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인데, 자기가 앞장서서 타인들을 지도하고, 심지어 타인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강압적으로라도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심층종교적 차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지지요...
그 점에서 비록 좋은 의도일지라도 남이 처한 상황과 더불어 그들의 의사를 잘 고려한 이후에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나 자신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유일한 길을 소유하고 있다는 독선적인 생각은 다양성과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개인에게는 저마다의 종교적 성숙의 과정이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점을 나누어줄 수는 있겠지만, 이마저도 정말 조심스럽고 겸손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p198
'열림'을 말씀하셨는데요, 아이가 아플 때에는 아이의 체질을 비롯해 구체적인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개인의 상황과 자율성을 무시한 채 '사랑'이나 '자비'라는 덕목을 만병통치약처럼 내세우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구체적인 맥락이나 상황에 열리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참된 종교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겸손과 더불어 지성을 발휘해야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의 이해와 타인에 대한 선의를 전적으로 확신하는 닫혀 있는 태도 말구요. ...
성경에 나온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겠지요.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거나 양자의 균형을 잃게 되면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없는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 같거든요. ... 뱀은 허물을 멋기에 새로운 의식으로 변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의사협회 문장에도 뱀이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뱀은 의식의 변화와 치유의 상징입니다.
p206
우리의 현생에서조차 무수한 죽음과 탄생이 가능하다는 것에요. 종교 전통들이 말하는 '거급남'이 바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지금 이곳에서의 죽음과 탄생의 사건을 의미하는 거라고 보거든요. 즉 협소한 의미의 자기가 죽고 의식의 새로운 확장이 일어나는 사건을 '거듭남'이라고 보면, 거듭남이야말로 종교의 심층적 차원으로 가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작은 죽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내가 도달한 인식의 수준이나 종교적 이해는 죽음 혹은 거듭남을 통해 계속 발전하리라는 희망과 더불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겸손함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p207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노怒wrath를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고 했지요. 용서라는 말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데,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죄는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성숙해 가는 데 겪어야 할 학습 과정의 일부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보시면서,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지므로 더 이상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절대적 사랑의 하느님이 지옥 같은 것을 마련했을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느님을 진정 확고하게 받아들인다면 천국 지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심층종교가 주장하듯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느님의 임재를 발견해야 한다는 거죠...
만약 천국이 우리 내면에서 발견된다면, 우리가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에 갈 것인가를 두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체험으로 알게 된 천국의 기쁨을 타인과 함게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려 노력한다면,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게 바로 심층종교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면 두려움과 공포에 뿌리 내린 종교가 아닌, 희망과 기쁨 속에서 커가는 종교가 될 것 같습니다.
p211
뭘러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이지요. 독일의 시성 괴테가 언어를 두고 한 말이지만, 뭘러는 이 말이 언어보다는 종교에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어요. 요컨대 자기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자기 종교도 모른다, 자기 종교만이라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p216
붓다는 가르침을 전하면서 독화살에 대해 연구하는 것보다는 독화살을 뽑아 자신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붓다으 얘기에 비추어보자면 종교학자는 독화살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고, 또 독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죠. 그래서 자칫 균형을 잃으면 종교의 이론적인 측면에만 과도하게 매달릴 위험성도 있어 보입니다.
p220
진정한 의미의 종교, 예수나 붓다와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 가르치는 종교는, 무지에서 생겨난 미망과 허상을 깨뜨리고 날마다 점점 더 깊은, 혹은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실상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쑤셔박고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헛된 위안을 팔고 사는 닫힌 종교가 아니라, 독수리처럼 더욱 높이, 더욱 멀리 봄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열린 종교이겠지요.
p223
심층종교가 각자의 내면에서 존재의 궁극적인 원인을 찾아가는 태도를 뜻한다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적 여정이 그야말로 끝이 없으리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부단한 여행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열림'의 태도와 더불어 끈질긴 '희망'이 아닐까. 열림의 태도는 우리에게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희망은 우리에게 용기와 끈기를 주리라 생각한다. 이 덕목을 벗 삼아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을 밟아가다 보면, 우리 모두가 더 큰 웃음과 희열을 맛보게 될 거라고 굳게 믿는다. 나아가 기쁨의 종교가 우리의 개인적 삶과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