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여행길 2011. 10. 29. 10:39

 

 

오주석 / 솔 / 2010

 

 

p26

옛사람들이 인간의 정서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에 절망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현상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던 그들은 한편으로 결코 겉에 드러난 외양에만 붙잡히지 않는 현명함을 또한 갖추게 되었다. 예사람의 눈은 이러한 마음자리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위대한 인간 또는 자연의 형상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는 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렇게 그리지도 않았다. 현상은 변화하는 것이고 위대한 것은 오직 거기에 깃들었던 인간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p27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고 사물의 외양보다는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이 바로 수묵의 마음이다.

 

p28

흑색은 참으로 신비롭다. 그것은 다채로운 유채색들이 그 화려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노년의 원숙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무채색은 지극히 순수하고 검소해서 내면의 정신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므로 승려의 장삼빛이 회색이고 신부와 수녀 복장이 무채색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한편 검정은 역설적으로 색 가운데서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것이기도 하다. 현대 패션의 거장들이 단일 색상 가운데 가장 즐겨 사용하는 색이 다름 아닌 검정이라는 통계가 있다.

 

p29

이제 우리는 상대적으로 흑백의 수묵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수묵화는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가능케 한다. 수묵화는 회화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양식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상을 낳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회색이 생리학적으로 시각 속에서 완전한 평형 상태를 낳는다고 말한다. 눈과 뇌를 연결하는 시각신경은 회색을 바탕으로 한 평형상태를 요구하며, 이 회색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정신적 불안정 상태까지 초래된다고 한다.

 

p30

수묵화는 점잖아서 보는 이를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감상자가 평정한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그림 속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수묵화의 감상은 감각되는 형상에 수동적으로 지배되고 압도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이가 사전에 풍부한 시각 경험을 쌓고 또 다양한 인생의 체험을 겪은 후에, 그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은근하게 작품이 암시하는 격조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흔히 문인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천 리의 먼 길을 다녀보고 만 권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p34

'고사관수도'는 고요한 그림이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기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이 물의 흐름처럼 잔잔하지 않은가? 시선이 고요하고 그응하므로 그림의 공간은 화면 바깥으로 안온하게 확장된다. 정작 화폭 속에 보이는 공간 자체는 아주 작은데도 느껴지는 것은 제한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화면의 대부분은 돌이다. 세상에 돌만큼 천성적으로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없다. 돌은 태초에 놓여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거센 비바람과 매서운 눈서리에도 꿈쩍이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저 바위를 닮은 노인의 시선을 보면 그 역시 성품이 바위처럼 듬직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돌은 흙의 정기가 뭉친 것이라 한다. 그러니 선비 또한 오랜 공부와 수양을 통해서 사람의 정기인 올바른도道를 한몸에 모두고 있음 직하다.

 

p40

물의 쾌상은 가운데 속은 양陽으로 굳세고 위아래 겉으로는 음陰으로 부드럽게 처신한다. 속은 올곧고 굳세어 쉬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지만 겉으로는 유약한 듯 부드러우니,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융통성 있게 에둘러가며 주변 땅의 생김새를 따른다. 바로 '외유내강'한 전형적인 군자의 덕이요 모습이니, 도덕을 잃지 않으며 또한 현실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는 "천하에 물보다 더 연약한 것이 없지만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기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씩씩한 맹자도 말했다. "흐르는 물이라는 것으 낲에 놓인 구덩이를 하나하나 모두 채우지 않고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이 이렇게 큰 바다까지 이르는 과정은 마치 "군자가 도에 뜻을 두고서 덕을 하나씩 이루어나가 결국 원대한 목표에 이르는 것과 같다"...

"물은 정말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위아래도 분별하지 못하던가? 사람의 성품이 착다하는 말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물을 세게 퉁기면 이마까지 닿게 할 수 있고 억지로 거슬러 밀어내면 산꼭대기까지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물의 성질을 따른 것이겠는가? 사람이 악하게 되는 것 또한 그와 같을 뿐이다."

 

p45

이렇게 부드럽고 온화한 강희안의 성격은 그의 "행장行狀"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공은 천성이 침착하고 바르며 고상하고 담담하였으며 또 너그럽고 공평하며 편안하고 낙천적이었다. 일을 대새서는 능력을 뽐내어 감히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았고 겉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가 도모하려는 계책 같은 것은 절대로 입에 담지를 않았으니,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성공하고 궁해재는 것은 다 정해진 한계가 있으니 구한다고 얻어지지도 않고 사양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혹 그 분수를 지나쳐서 실패와 재앙이 따를 뿐인데, 어찌 수고하며 일을 도모하여 제 분수 아닌 것으 바라겠는가?" 어떤 이가 그의 게으름을 놀렸지만 공은 좋은 낮으로 대할 뿐이었다.

 

p99

윤두서의 눈빛은 고요하다. 안면의 어느 부분보다도 짙은 먹선으로 그려졌고 날카롭게 치켜진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은 침착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평생을 공恭과 경敬으로 일관한 삶의 정신이절로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눈꼬리 쪽에 두세 줄씩 잡혀 있는 자잘한 눈주름 때문일짇 모른다. 윤두서는 허망한 세월 속에 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끝없는 초상치레로 이어졌던 세월은 늘어진 볼 위에도 슬쩍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곱게 진 쌍꺼풀이 이채롭다. 그것은 중간쯤에서 풀려나와 눈썹과 평해선을 그었다. 눈썹은 씩씩하게 치켜 올라간 검미劍眉다. 용맹스런 무사의 그것과 같은 곧은 눈썹은 끝으로 갈수록 흐려지고 넓어진다. 강인하면서도 중후한 인상이다.

 

p117

산에 살며 생각나는 대로 읊다

 

문장이 세상을 놀라게 한 들 다만 누가 될 뿐이오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역시 그저 수고로울 뿐

그 어찌 산창의 고요한 밤에

향 피우고 말없이 앉아 솔 바람에 귀기울임만 하리오

 

한 시대를 울렸던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남긴 글귀라 하기에는 뜻밖에도 적막하고 고요한 울림을 담고 있는 시다.

 

옛 먹을 가볍게 가니 책상 가득 향내 나고

벼루 골에 물 부으니 얼굴이 비치도다

 

창작 생활 중의 어느 순간 해맑고 향기로웠던 느낌이 잔잔하게 던해온다.

 

산새가 날마다 오나 기약 있어서가 아니오

들꽃은 심지 않았어도 절로 향을 내는 구나

단원 늙은이

 

이제 늙은 단원은 아마도 세상을 관조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던 것 같다. 그래서 저녁놀 그늘 속에 제 집을 찾아가는 흰 새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푸른 산 그늘 속으로 누구 기약 있어 바삐 가나?

 

p126

시성 두보가 59세로 죽던 해에 쓴 다음 작품

 

한식 전날 배 안에서 짓다.

 

좋은 때라 억지로 마시며 먹으매 날이 오히려 찬데

상床을 비끼고 쓸쓸하니 은자의 관을 썼네

봄 물의 배는 하늘 위에 앉은 듯하고

늙은이 되어 보는 꽃은 안개 속에서 보는 듯하네

 

곱디곱게 노는 나비 한가론 휘장을 지나치고

새뿐새뿐 가벼운 갈매기 빠른 여울에 내리누나

구름희고 뫼 푸른 만여 리 길이건만

바로 북쪽이 장안인 양하여 시름하여 보노라.

 

p131

여백은 그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각에도 여백이 있다. 조각이 삼차원 속의 덩어리라면 그것을 둘러싼 공간은 여백이다. 공간이 없는 덩어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간이 덩어리를 에워싸고, 덩어리와 어우러져 서로 침투하고 서로를 낳아야 한다. 음악에도 여백이 있다. 누군가 "음악은 침묵하는 하얀 백지장 위에 소리라는 뭇으로 그려낸 그림이라 하였다. 또 허공을 맴도는 음악이 그대로 얼어붙으면 조각이 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침묵의 여백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지고 손상되었을 대 심금을 울리게 하는 음악이란 있을 수 없다. 여백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여백이다.

 

p133

옛 그림의 여백 사용은 자연의 모리를 파악해서 얻어낸 최상의 기법이요,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여백으로 드러나는 하늘과 물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것의 외면 형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과 물의 본질적인 속성은 그것이 가지는 무한한 공간적 확산성, 그리고 그 공간이 하늘을 나는 새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에 부여하는 무한한 자유에 있다. 이 공간과 자유는 그림의 바탕을 가장 그대로 이용하고 하등의 인공적 작위 가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p135

텅 빈 하늘이 있은 후에야 휘황한 달이 아름답고, 아지랑이 서린 아득한 공간이 있어야만 그 앞에 뻗어난 한 줄기 댁가지가 풍류롭다. 보이는 형상은 빈 여백 공간과 끊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무에 의지한다. 아니, 유는 드러난 것이고 무는 감추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빈 공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여백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히 크고 넓어서 그려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징하고 있다. 음악에서도 극히 여린 소리와 깉 침묵의 순간에 숨죽이는 더 큰 감정의 떨림이 있고, 무용에서도 정중동으로 가만히 들어 올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미세한 동작 하나가 보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p145

조선 왕조는 본래 성리학을 잉태했던 인본주의, 문치주의 국가인 북송의 문물 제도를 모범으로 해서 성립한 나라다. 그러니 성리학의 토대를 확립한 희이선생에 대한 존숭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앞 희이선생의 고사는 한 나라의 개국과 관계되는 상서로운 조짐을 묘사한 것이며 아울러 참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보여주는 속 깊은 내용이다. 또 희이선생이 늘 주장했던 것이 군주된 이는 금단술이니 신선술이니 하는 개인적인 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 것에만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만큼, 숙종 임금이 그림을 감상하고 마음에 느껴 손수 시를 짓고 쓴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p152

세한도歲寒圖는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시절이 추우면 추울수록 사람들은 더욱 따스함을 그리워한다. 그리하여 조그만 온정에도 마음 깊이 감사하게 되니, 이것이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p157

그러나 <세한도>에는 꿋꿋이 역경을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고 견정한 의지가 있다. 저 허름한 집을 찬찬히 뜯어보라! 메마른 붓으로 반듯하게 이끌어간 묵선을 조금도 허둥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하다고 할 정도다. 초라함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 연민이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 집주인 완당 김정희, 그 사람을 상징하는 허름한 집은 조촐할 지언저 속내는 이처럼 도도하다. 남들이 보건 안 보건, 미워하건 배척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이 집에서 스스로가 지켜 나아갈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던 것이다.

 

p208

앞서 "우리 옛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멋드러진 선"이라고 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인물화에는 이와 유사한 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도 이와 비슷한 선을 쓰며, 아니 더욱 정교한 선을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저들 그림의 약점은 오히려 그 정교함에 있다. 이 소년의 경우처럼 인위적인 느낌이 없는, 참 천여덕스럽게도 척척 그어댔구나 하는 선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그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선이 있다. 하지만 그 경우도 역시 그들은 강렬함 자체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옛 그림에 보이는 자연스러움과는 영 다른 것이다. 이 자연스러움은 어쩌면 만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우리 조상들의 타고난 낙천성과 대범함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p212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서로 많이 다른데, 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경함한 삶의 내용이 서로 다른데서 온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훌륭하고 고상하다고 학교에서 배웠어도, 또는 애국심의 발로로 우리 전통 음악을 사랑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아도,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들을 기회가 적으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란 힘들어진다. ..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는 오랜 진리이다.

 

p213

작품 내용을 의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것이다. 손은 '신체 바깥으로 드러난 뇌'라는 말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임모, 즉 베끼는(copy) 행위가 화가의 가장 큰 스승이다. 그것은 작가의 기술적 비밀을 공유케 하고 창작과정에 그대로 감정이입되도록 함으로써 작가 영혼의 미묘한 숨결까지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체엄은 참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임모할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림은 손은 물론이고, 눈과 마음으로도 베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자 자신이 마치 화가인 양, 그림의 부분 부분과 획 하나 점 하나를 그려나가듯이 차근차근 살펴보고 또 내용을 혼잣말로라도 중얼거려본담녀 작품의 조형 세계는 우리 뇌를 통과해서 감상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 각별한 각인을 남기게 된다. ... 조형을 언어로 바꿀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기 쉬운 그 무엇으로 바뀐다...

훌륭한 그림은 진정 훌륭한 인간과 같다. 만나면 만날수록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가치가 깎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진가를 발한다. 게다가 사람처럼 늙거나 변하지도 않는다.

 

p226

문인화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선비 그림이다. 그럼 선비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늘이 내려주신 착한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문인화에서는 소재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반드시 그리는 사람의 담담하고 조촐한 인품이 전제되는데 이인상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인상의 대표작하며 대뜸 <설송도>가 눈앞에 떠오른다. <설송도>를 대하면  내앞에 능호관 그분이 실제로 서 있는 듯한 엄숙한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p248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연철학이다. 그것이 아무리 자연을 넘어서서 사람의 윤리와 국가의 운영 원리로까지 확장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때에 따른 적절한 변화의 효용을 중시하는 사상일지라도, "주역"과 이에 바탕을 둔 성리학의 근본 정신은 항상 심상한 것, 중용적인 것, 무리하지 않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놓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문면이 종종 지나치게 추구하는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인 통제되지 않은 감정의 방만한 분출 등을 옛 성리학의 정신이나 그것에 바탕을 둔 옛 그림의 마음과는 일절 인연이 없는 것이다.

 

p262

옛 그림 속의 자연은 이처럼 그저 객관적 사물, 곧 인간의 관찰대상에 그치지 않고 항상 사람의 성품이나 덕성과 연관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즉 자연과 인간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 몸이라고 보는 물아일체적인 관점을 굳게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인간이 합하여 하나를 이룬다"는 드높은 경지에서 동양적 사고의 정점을 이루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지극히 숭고한 경지까지 승화되었다.

'2011 > 10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닥터 노먼 베쑨  (0) 2011.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