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월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_ 백낙청 _창비

여행길 2011. 7. 18. 13:14

 

 

통일시대, 마음공부, 삼동윤리

p 291

대산종사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더군요. "출가할 때 도통하러 나왔다고 하지 말고 세계사업 하러 나간다고 해야 합니다. 세계사업 하면 도통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도통을 따로이 바라지 말고 이제는 활동시대이니 활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도통을 하자 말라는 말씀은 물론 아니죠. 그러나 새시대의 도통은, 가령 통일시대에 우리가 어떤 사럽을 하고 더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어떤 사업을 할까, 이걸 잘하는 뭄ㄴ제와 떠나서 따로 도통을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옛날식으로 혼자서 수도생활만 하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하고 신나는 점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렵고 까다로운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p294

시야를 조금 확대해서 보면 사실 이 땅의 분단체제만이 아니라 현대의 세계체제라는 것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의 힘으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경제의 작동원리가 무한정한 자본축적이지요. 끊임없는 이윤추구예요. 물론 사럽가가 자본가 개개인은 그대로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그걸 안하는 사람들은 탈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무한정으로 탐심을 내야 성공하는 사회가 오늘의 자본주의사회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한다면,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데요, 국가경쟁력이니 무슨 경쟁력이니 경쟁력이라는 말을 싫도록 듣습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물론 꼭 나쁜 건 아니지요. 정당한 공부심, 정당한 분심(忿心)을 일으키는 것도 경쟁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완전히 짓밟혀버리기 일쑤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내가 살려면 너는 죽어야 한다는 식의 경쟁이 되지요. 더 잘한 사람이 선진이 돼서 후진을 이끌어 주고 하는 경쟁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정당한 분심일 수가 없고 상대방을 미워하며 성내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독근(毒根)이 되는 것입니다.

치심으로 말하면, 이렇게 병들고 어지러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유지시켜주는 큰 힘이 저는 현존 체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안이 없지 않는냐? 현실이 이런 거고 자본주의사회의 무한 경쟁, 무한 탐심과 진심의 세계 이외에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영국의 대처수상이 그렇게 말했다지요 "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이 없다"라고요. 이거야말로 사연사조(捨捐四條)에 모조리 걸리는 말이죠. 병들지 않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심도 없고, 새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분심을 내기는커녕 탐욕에 빠지게 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의심도 하지 말라며 게으름을 조장하고, 그래서 이 진흙구덩이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오히려 미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치심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현존 세계체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전체의 현실을 보건 분단상태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건, 마음공부를 정말 제대로 하지 않고는 깨뜨릴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마음공부는 혼자서 수양을 하고 도통을 한 뒤에 그때부터 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는 공부가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이런 병든사회를 바꾸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원만한 공부를 해나가는 그런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300

첫번째 강령인 동원도리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진리는 하나다, 모든 종교가 근본에서는 하나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그렇다"하고서 좋게좋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각 종교의 교리를 놓고 비교해볼 때 양립이 가능하지 않은 게 너무나 많은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정산 종사께서도 '일원(一圓)의 진리'로 통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원의 진리에 의한 종교통일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의 자발적인 승복을 얻어낼 수 있는 수행과 실천이 없으면 원불교가 자기를 중심으로 통일하려는 독단으로 비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모든 종교를 일원으로 통일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것도 참 겁나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황금률이라는 게 있죠.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도 베풀어주라는 가르침인데, 세계의 많은 종교에 이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황금같이 소중한 계율이다 해서 황금률이라고 부르는데, 실은 마음공부를 전제하지 않고는 이게 그다지 좋은 계율이 못 되고 말지요. 마음공부가 안된 사람이, 자기가 배우기 싫다고 남한테도 공부하기를 권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내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좋아하니까 다른 친구들까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끌어들인다거나 한다면 이건 망하는 세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황금률이라는 좋은 윤리도 "일원대도의 정신을 투철히 체득"하는 공부가 따를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원불교의 보통급 십계문 중에서 첫 조항이 "연고없이 살생하지 말라"는 건데, 그것과 대비하더라도 어떤 점에서는 너무 편협하고 어떤 점에서는 너무 포괄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만 했지 살생하지 말라고는 안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너무 좁고요, 반면에 원불교에서는 '연고없이'라는 토를 달아서, 물론 이 단서가 계문을 안 지키려는 사람에게 좋은 핑계거리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런 토를 안 달고 무조건 "살생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이렇게 말하면 뭔가 현실성이 없는 계명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원불교에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비폭력을 주장합니다만, 모든 무력(武力)배제하지는 않지요. 정전 '동포보은의 결과' 조항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일 전세계 인류가 다 보은자가 되지 못할 때에, 혹 배은자의 장난으로 인하여 모든 동포가 고해 중에 들게 되면, 구세성자들이 자비방편을 베푸사 도덕이나 정치나 혹은 무력으로 배은중생을 제도하게 되나니라" 그러니까 구세성자들이 자비방편으로 베푸시는 무력도 있단 말이지요. 그게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그걸 베풀거냐하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우리가 엄연히 인식해야 할 이런 현실, 무력활용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비폭력의 윤리를 얘기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그냥 거룩한 말씀을 한 것에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결국 주요한 것은 '연고'를 정확히 따져서 슬기롭게 인정하는 공부입니다. '연고없이' 이러저러하지 말하는 조항을 계명을 안 지키는 구실로 삼을 게 아니라 제대로 지키는 방편으로 삼는 마음공부가 전제되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원불교의 세밀한 공부법과 훈련법을 인류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독단이겠고, 소태산 대종사님 스스로 당신의 교법 가운데 "일원을 종지로 한 교리의 대강령인 삼학팔조와 사은 등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다시 변경할 수 없으나 그밖의 세목이나 제도는 그 시대나 그 국가에 적당하도록 혹 변경할 수 있나니라"라고 하셨으니까 훈련법에 대해서도 당연히 신축성을 두어야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공부르 해서 인생의 요도에 해당하는 윤리를 실현할까 하는 것을 제시함으로써만 '전지구적 윤리'라는 것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p305

그런데 불교나 원불교는 표현은 서로 좀 다릅니다만,원불교에서 말하는 '성리(性理)공부'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견성(見性)하는 공부, 성품자리를 깨치는 공부지요. 대종경 성리품에도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이는 원만한 도가 아니니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셨고, 대산 종사께서는 "성리는 꿔서라도 봐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리공부를 강조할 경우 종교들, 특히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가 과연 동원도리라는 명분으로 함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라든가 다른 종교자체 내에 성리공부에 해당하는 요소가 없다면 일치할 수가 없고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저 나름대로 학습해본 그리스도교에는 사실 성리공부에 해당하는 요인들이 꽤 있다고 봅니다. 원불교에서는 흔히 기독교는 타력신앙이고 원불교는 자력신앙이라고 구별하곤 합니다. 또  기독교의 신앙제일주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문자 그대로 고집한다면 공부의 '진행사조' 중 '신(信)' 단곙 멈춰선-적어도 의심공부가 생략된-불완전한 공부라고 보겠지요.

이런 구별은 대강으로 봐서는 맞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확실히 맹신에 기울어 있고 하늘에 복을 비는 데 열중한 모습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의 구별만 해도 그렇게 딱 갈라지는 것이 아니지요. 원불교에서도 타력을 빌려오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교에서도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걸 강조하시만 각자의 선행도 중시합니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선행이 구원의 조건에 포함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나오면서 천주교의 그런 선행 요구를 교회의 교단이기주의라고 배격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자력주의가 개신교에 와서 강화된 면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바오로)이 쓴 로마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장 28절)이런 말이 있는데,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성경을 독일어로 옮기면서 이 구절에 한마디 덧붙여서 "믿음으로만"으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선행보다도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것이지요.1  그 점이 칼뱅에 오면 더욱 도드라져서,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지옥에 갈지가 이미 다 예정되어 있다, 그건 전부 하느님 맘대로 하는 거지 믿고 말고도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도 하느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내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100%타력신앙으로 전환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사람들이 제일 열심히 세속사업을 하고 자력양성을 하는 성향을 보여주게 됩니다.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정신이 관련이 깊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지요. 왜냐면, 내가 구원을 받도록 하느님이 예정을 해놓으셨는지 아닌지 내가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하는 꼴을보고서야 '하느님이 나를 구원해놓으셨으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구나'하고 안심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자력과 타력의 관계가 그리스도교안에서도 굉장히 복잡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도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비록 지고의 존재자라 하더라도 그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은 있는 것, 有에 집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유무초월의 자리에는 못 가는 것이지요. 진리는 못 깨치는 거고, 언어도단의 入定處에는 못드는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예컨대 우상숭배 금지, 내가 유일한 하나님이니까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유일신 신앙의 다른 일면인데, 이걸 잘 해석해보면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기 전에 하나님이 불타는 덤불 속에 나타나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보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어떻게 답할지를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답변이 우리말로는 개역성경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장 14절)라고 번역되어 이씁니다. 영어로는 "I am THAT I AM"인데, 얼마 전에 도올 김용옥 박사가 이 대목을 번역한 걸 보니까 "나는 스스로 그러한 자이다"라고 했더군요. 아시겠지만 영어의 be 동사는 '있다'는 뜻과 '이다'는 뜻을 겸하고 있지요. 그래서 도올은 be동사의 '이다'라는 면을 강조한 것이고, 개역 한글성경은 '있다'쪽에 강조를 두어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하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그러한 자이다'라고 하면 그야말로 원불교 문자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한 존재가 되지 않습니까. 야훼라는 이름이 원래 'I AM'이라는 뜻이지 특별한 고유명사가 아니라고 해요. 몰록이라는 신도 있고 바알이라는 신도 있고 무슨 신도 있는데, 그런 여러 신 가운데 야훼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신이 아니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고 우리가 어떤 상(相)으로 잡을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런 하느님이 나다, 이렇게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우상숭배 금지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절대적인 존재자에게 무한대로 집착하라는 계명일 수도 있지만, 또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 일쑤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상을 둘 경우 인간이 어찌하든 인간의 능력으로 갖는 상은 다 우상이니까 그걸 치워라, 끊임없이 깨버려라 하는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일단은 소박한 믿음에서 시작하되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상이 생길 때마다 그건 모두 우상이니까 깨버려야 한다는 거라면, 그건 의심공부를 포함하는 것이고 온전한 성심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불교의 공부법과 통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말하듯이 야훼라는 절대적이고 막강한 분이 계서서 믿으면 천당 보내주고 안믿으면 지옥에 보내버린다 이렇게 겁주고 다니는 건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든 데 불과합니다. 그래서 2차대전 때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본회퍼라는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가 있는데, 그가 자기의 심경을 표현하여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분은 말하자면 유무초월의 경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경지에 도달했다고 봐야지요...

실제 그리스도교인들의 행태가 원만하지 못한 사례가 흔한 것도 그런교리와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과격한 교리조항을 화두로 삼고 의두로 삼는다면 성리공부릐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동원도리'의 강령에 그리스도교가 포함될 가능성의 확인이기도 하지만, 원불교 입장에서는 그 이상의 참고로 삼을 소지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원불교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중도를 강조하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파격성과 편벽됨을 바로잡기에 적당한 가르침인 반면에, 때로는 조그만 그릇에 물이 쉽게 찬 것을 놓고 원만구족이라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는 폐단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은 그릇을 끊임없이 던져버리고 꺠뜨리면서 큰 국으로 원만구족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경우에 저는 성리공부가 없다기 보다는 공부법이 원만하지 못하고 중도와 중정의 실천법이 미흡하다, 이렇게 말하는게 타당할 것 같아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나름대로 성리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그걸 더 원만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종교가 원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때는 자연스럽게 삼동윤리의 동원도리 강령을 더 자신있게 주장할 수가 있는거지요...

만약에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시대가 한 2천년 앞섰으니까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원불교에 와서야 한층 원만하게 제시된 교법을 향새 미숙하게, 아직 때가 차지 않았던 까닭에 서툴게 그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P324

제가 볼 때 일제하 소태산 자신의 온건노선은 오히려 후천개벽이라는 엄청난 변혁과제를 설정했기 때문에 근시안적인 과격노선을 배제했던 것이지, 순응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천개벽은 최수운 선생의 동학 이래 우리의 민족종교운동에서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이루었죠. 그런데 제가 볼때 소태산 사상에서는 몇가지 새로운 특징이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그중 하나는, 구한말에 민족종교가 선천시대를 마감하고 후천시대를 맞이하면서 모두가 우리 전통 속의 유불선, 즉 유교와 불교 그리고 선도의 종합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이 작업을 하는 데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새 회상을 건설하겠다고 하셨죠(대종경 서품 2장). 그 점에서 가령 수운 선생이나 강증산 선생과 구별된다고 봅니다. 수운의경우에는 그분이 유교 정권에 의해서 이단자로 처벌받았습니다만, 사실은 원시유교의 전통을 복원하고자 한 면이 강하고, 강증산 선생의 경우는 선도 쪽에 더 치우쳐 있지 않았는가, 선도를 중심으로 유불선을 통합하려 했던 데 비해, 소태산은 불교를 중심으로 불법을 주체 삼아 새 종교를 만드셨습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불교가 중심이 되지 않는 유불선 통합은 어느정도의 통합이야 될지 몰라도, 유불선 세가지만 통합하고 끝내자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도전에 맞서서 근대과학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서도 배울건 배우고 이래야 한다고 할 때는 유교나 선도를 주체 삼아서는 훨씬 어렵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역시 불법이 기본이 될 때 그것이 원활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주체로 삼았기 때문에 그 종합이 한층 원만해졌고요. 뿐만 아니라 도학과 과학의 병진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불교와 비교해보면 여러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불교에서 삼학이라고 하면 계戒 정定 혜慧이고 그중에 우리의 행동과 직접 관련된 것이 곙니데, 그러나 그것은 삼학의 출발점 정도죠. 계를 열심히 지키고 정 공부를 하고, 그러면서 혜뚜가 열려서 공부가 완성되는 그런 순서인데, 원불교에서는 삼학의 병진을 강조하는 가운데 작업취사가 마지막으로 오면서 이것이 삼학 공부의 열매에 해당하는 꼴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계를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시대에 걸맞은 사회적 실천 같은 것이 다 그야말로 그 사람이 공부를 제대로 했나 안했나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는 거지요.

전토적인 불교와 구분되는 또 한가지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인데, 우리가 그냥 도 닦아서 대각을 하자든가 정신을 개벽하자는 한마디로 끝낸 게 아니라 물질이 개벽되니까 거기대응해서 정신을 개벽하자는 다그침이지요...물론 석가모니 부처께서도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시대에 부응하는 법을 내셨고 불교가 발달하고 진화하면서 그때그때 시대에 대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대응을 해왔습니다만, 전통불교에서 깨달음 자체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깨달음이라는 면을 강조합니다. 그에 비해 원불교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시대인식이 매우 중요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까 과학과 도학의 병진을 얘기했습니다면, 시대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 중요시되고, 그래서 '최초법어'의 첫 명제도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정전 수행편 13장 1절) 라고 되어 있지요. 전통적인 불교에서 이런 것이 부처님의 최초설법 내용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1. '물론 사도들 중에서도 야고보는 실행이 안 따르는 믿음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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