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마음공부_페이융 지음, 허유영 옮김_유노북스_2015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열심히 살아가면서 번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비심을 발휘해 그들이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수행이며, 남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일불승이자 대승불법이다. 철저히 근본으로 돌아가 전체를 바라보고 가장 궁극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목표'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부처가 말하는 불법에는 목표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장 궁극적인 '존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는 모든 사람이 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업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공통된 업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더 이상 개인적인 차원의 수행이 아니라 민족, 인류, 지구, 우주 전체에 대한 관조이자 통찰이다.
어떤 인생이든 단 한 번뿐이며 반복될 수 없다. ...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야 하고 즐거워야 하며 담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든 대충하지 말고 철저히 하는 것이다. 일단 피기 시작하면 흐드러지게 만개하는 꽃처럼 자기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 채 남들이 하는 대로 끌려다니고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틀레 박힌 생활을 한다...
평범한 우리에게 '완전한 통찰'이란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미련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생명이란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우리는 결국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하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리고 만다.
한편으로는 바로 지금이 멈출 수 있는 때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혼자 멈추어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미 떠난 사람이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나? 파산한 사업이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나?... 실연과 파산은 슬픈 일이지만 두려운 일은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고, 당신의 육신과 영혼은 건재하다. 생각해 보라. 애인이 떠나고 재산이 사라졌다면 애초 그건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원래 당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잃어도 상관없다. ...
세상에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건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도 수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착하거나 사회가 정한 원칙에 따라 결혼 상대를 찾는다. 그러면 성욕을 채우고 가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랑이란 직감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흔한 말이지만 사랑이란 자신의 반쪽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아야만 두 사람이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
일이나 사업에도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 있다. 첫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고 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안정적인 일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안정적인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야만 안정된 인생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연인 또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사회의 요구에 걸맞고 섹스하기에 좋은 상대이자 적당한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이다. 그 속에 사랑은 없다. ...
사랑을 찾는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욕망을 찾거나 자신이 바라는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는다.
부처는 종교 지도자로 추앙받으면서 자기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았고 남들엑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원점으로 돌아가 자기 안에 있는 에너지를 찾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허울뿐인 권위나 우상은 우리의 문제를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
부처는 제자에게 수기를 줄 때마다 제자가 과거의 수많은 전생에 이미 수많은 부처를 공양했고 앞으로 수많은 내세에도 수많은 부처를 공양할 것이며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그도 부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이르면 세상 밖의 취미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
부처가 되는 것은 대단히 심오하거나 현묘한 일이 아니라 우리 마음가짐이 변화되는 것이다.
혀의 근본이 맑고 깨끗하면 큰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다. 평화롭고 작은 소리로 말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사방에 저절로 기쁨이 넘치게 된다.
행복은 완전히 주관적인 감정이다.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추구하든 상관없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자신의 처음과 끝은 어디에 있으며, 자기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안다면...
석가모니가 참섬을 하고 있을 때 마라가 찾아와 그의 수행을 방해하려고 했다...그러자 석가모니가 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이고, 두 번째 군대는 혐오이고, 세 번째 군대는 배고픔과 목마름이며, 네 번째 군대는 오욕을 탐하는 마음이다. 다섯 번재 군대는 피로와 수면이요, 여섯 번째 군대는 공포심이며, 일곱 번째 군대는 의혹, 여덞 번째 군대는 위선과 이기심이다. 아홉 번째 군대는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이익과 명예, 명성이고, 열 번째 군대는 허풍 떨며 잘난 체하고 타인을 폄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혜로써 이것들을 궤멸시킬 수가 있다"
비록 방식을 다르지만 모두 진실하고 거짓됨이 없다.
이 모든 부처들이 멸도한 후에는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법화경>을 계속 설했다. 모든 부처가 끊임없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 연꽃처럼 아름다운 불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 왔으며 모든 사람이 불법을 깨달아 더 이상 부처가 불법을 설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부처는 항상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가 속세의 뿌연 먼지 속에서 뒹굴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씩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어쩌면 당신도 나도 어느 날 갑자기 부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부처가 오래 전부터 우리 곁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상(만물이 끊임없이 생멸과 변화를 겪음)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글귀만 보고 이해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자기 돈을 남에게 주라고 하면 선뜻 내어주기 힘들다. 자기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원망은 당신이 미워하는 상대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원망을 내려 놓지 못하면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결국 상대가 당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당신에게 계속 상처를 주는 셈이다. ... 물로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집착하면 그 사랑은 물론이고 당신이 집착하는 상대까지 모두 당신의 짐이 된다.
몸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보살이 행할 것이란 무엇인가? 욕됨을 참을 수 있고, 부드럽고 선하고 순하고 포악하지 않으며,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그 무엇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사물의 실제 모습을 보되 차별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행할 것이다.
악인들과 함께 살지 말고, 만일 그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그들의 깨달음 정도에 따라 불법을 얘기해주되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
특히 부처는 권력자에게 빌붙지 말고 악인과 가까이 지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으며 굳이 그가 불법을 믿도록 설득할 필요는 없으며 존중하되 멀리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이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모든 것을 순리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다음은 남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말고 다른 법사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남을 쉽게 평가하지 않는것이다. 또 불교에 귀의한 뒤 집에서 사는 사람이나 출가한 사람들에게 큰 자비의 마음을 갖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 일상생활에서도 수행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남의 험담을 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하루하루가 쌓이고, 한 해 한 해가 흐르면 어느 순간 이 세상이 깨끗해졌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꾸고 싶은가? 그럼 당신 스스로 바꾸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 사이의 시시비비와 복잡한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남의 잘잘못을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언제 어디서든 남의 잘잘못을 논하지 않으면 시끄러운 시비가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인간관계가 점점 단순해 질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항암 치료를 포기한 후, 오랫동안 하고 싶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땅을 밟고 햇볕을 마음껏 쬐며 사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베이징 교외의 농촌에 집을 얻어 이사한 후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에도 그는 죽지 않았고 다시 검사를 해보니 암세포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중요한 건 이 두사람이 죽음의 문턱에서 과감히 모든 걸 포기한 뒤 오랫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속세의 삶에 있는 그 유일한 문을 연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이것이 우리가 사는 유일한 의의다. 인생의 모든 진리와 이치가 행동으로 옮겨지면 단 한마디로 귀결된다.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언제 죽을 것인가는 순리에 따르면 된다.
수행이란 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이런 작은 일을 실천하고 아주 오랫동안 변치 않고 지킬 수 있다면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