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_ 3호

여행길 2011. 7. 9. 17:05

p24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부적 역량강화에 집중하라 _ 도재기 _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

지금까지 잘 해오지 않았는가. 욕심을 부리거나, 조급하지 않았으면 싶다. 안그래도 세상을 급하게 돌아가며, 너무 욕심이 넘친다. 원불교인 모두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 저절로 돋봉리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2000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700년이다. 대각한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문을 세상으로 크게 열어젖힌 것이 1916년이니, 송구하지만 이제 100년이다. 향후 수천만년 영속할텐데 '이제' 100년일 뿐이다. 원불교 누구를 만나더라도 청정한 법기운이 우러나오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주세교단이란 성업을 이룩하는 원동력이라 본다... 종교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을 넘어 사회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해야한다. 그중 하나가 소외받고 가난하고 뒤처진 약자들을 보듬어 안는 사회통합 역할이다.

 

p27 원불교인들이여, 원불교이야기 말고 세상이야기를 하자 _ 조현 _ 한겨레 신문 종교전문기자

한방울의 물이 대해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이 물음은 '한반도 서쪽의 궁벽한 산골에서 태어난 한 종파가 세상의 보편 종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세상에 탄생한 모든 생명의 본능은 살고자한다 .죽기를 원하고,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은 없다. 사람만이 아니라 신념, 사상, 종교, 국가도 마찬가지다.

원불교인들의 간절한 열망 덕분인지 영광에서 나온 한 종파는 사멸하지 않고 여전히 한방울의 물로 생명을 보존하고 이싸. 원불교의 교전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거나, 원불교 종사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을 만나본 이들이라면 '원불교라는 물 한방울'이 얼마나 수정처럼 빛나고 진주처럼 영렁한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너무도 귀해서 흘러 보낼 수 없는 걸까. 원불교는 이 한 방울의 물을 아직도 신주단지 안에 모셔져놓고 있는 것만 같다....

100년을 넘어 1천년, 1만년의 만수무강을 간구하는 원불교인들이 소비자(세상)에 대한 촉수의 감각을 열기보다는 고치 안의 누에처럼 내부 세계에 침잠해 고단백질화해가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인 오경환 신부는 설문조사를 거쳐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호감'을 들었다. 사람들은 평소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이나 반감을 갖게 되고, 아무리 열심히 선교한다하더라도 평소 호감하지 않는 사람을 입교시키기는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원불교는 어떨까.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올만한 이미지가 없다. 그저 모나지 않은 "(모)범생이' 집단으로 인식될 뿐이다. 원불교가 세상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한 진리와 수행자들과 실천가들과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대중들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이미지 자체를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마음 자체를 불러오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까지도 원불교인들의 관심은 '내부'지 외부인 '세상'이 아니다. 자기들만의 '끼리집단'같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전히 대중들이 아니라 '조직 내부의 눈치'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경향이 짙다.

'원불교 진리'라는 다이아몬드에 대한 자부심으로 원불교인들은 심리적인 보좌에 앉아있다. 그래서 떄로는 아이가 왜 우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인삼을 달여 강제로 떠먹이는 아이 엄마나 정서적 교감도 되기 전에 러브호텔부터 잡는 성급한 총각이 된다. 그리고 거부 당하면 다이아몬드도 못 알아보는 세상 사람들의 빈약한 안목을 탓한다. 하지만 상품도 사람도 종교마저도 공급자는 '나의 필요'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소비자 주권 시대의 상식이다. 소비자가 무엇을 선택하기까지는 그 우수성만큼이나 '얼마나 필요한 것이냐'가 관건인 때문이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다이아몬드보다 밥한술이 필요하고, 사막에서 목이 마른 사람에겐 산삼보다 물 한 모금이 절실하고, 그을 몰라 답답한 사람에겐 '지고한 진리'만큼이나 글자 선생이 간절한 법이다. 원불교에서 가장 많이 쓴 말이 '은혜'지만, 자신에게 넘쳐하는 것을 주는 것과 (설사 내게 없는 것이라도) 상대가 절실한 것을 찾아주려는 것 과운데 어느 것이 더 은혜가 될까.

지구상의 최강자였던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조차도 높은 보좌에 앉아있거나 구라파 제국들의 군함을 타고 천하를 통섭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성서만이 아니라 약이나 식량과 책과 악기를 들고 척박한 오지와 사지로 떠나 어울리면서 그들이 필요에 응했던 순교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현대는 소비주권시대요, 다양화시대요, 창의력의 시대다. 그런 시대에 나아가 소통하기 위해 '필요'를 찾아 헌신 봉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부는 교단의 정서와는 아주 다른 수도원을 꾸려 새로운 실험에 나설수도 있고....소태산과 정산과 대산을 진정으로 빛내는 것은 그들 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떠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엄마 치마폭에서 노는 마마보이가 아니라 당당히 독립해서 제삶을 살아가는 자식이 효자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초중학교의 '위인전 읽기' 수준에서 벗어나 100년 전이 아닌 오늘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대해를 한 방울의 물 안에 담을 수는 없다. 내 필요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에 귀를 기울여 볼 때 다. 그래야 세상과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통해야 한 방울이 물이 세상으로 흐를 물길도 열린다.

 

p36  법인을 나투라 _효산 조정근 종사

'대각을 하겠다' 이 말이 너무 거창하면 '내 마음을 내 맘대로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하고 생각하면 좀 쉽게 마음 먹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