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5호

여행길 2011. 7. 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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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명예교수 김경재 목사_ 종교는 진리의 궁궐이 아니라 봄마다 새순을 내는 나무이다.

종교 간 대화 협력에는 단계가 있다. 1단계는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 2단계는 현실에 부딪친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자, 3단계는 선한 일을 같이 하는 동지를 알려는 단계이다....종교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서로의 진리를 아는 단계를 넘어 영성적 대화를 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종교와 종교, 종교와 사회가 내면의 깊은 공명을 느낄 수 있는 단계로 갔으면 한다. 사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를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신학자로서 원불교에 대한 견해를 묻고 싶다. 불교라는 종교의 거대한 생명나무가 인도에서 발원해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동쪽으로 오다가 중국을 거쳐서 대승불교의 꽃을 피웠다. 이후 불교가 중국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한자문화와 종교전통 속에 갇혀서 일반 바닥 서민들은 불교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워진 때에 불교 자체를 또 한 번 한국적 불교로서 개혁을 한 것이 원불교다. 말하자면 거대한 불교전통이 굳어져갈 때 나온 새순이라고나 할까. 가톨릭이라는 중세 거대 전통 속에서 개신교가 나오고 개신교 안에서 감리교가 나왔듯이 새순을 내는 과정이 종교사회의 역사의 전개 과정이다. 원불교는 번잡스럽지 않고 단순하되 불교가 지향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해탈정신이나 자비심의 실천이라는 핵심 요소를 갖추고 있다. 과감하게 불당 안에서 불상을 제거하고 일원상 하나로써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으 엄청난 종교적 혁명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불교의 누천 년 쌓아온 종교적 의례들이 도리어 걸림돌이 됐을 때에 그것을 치워버리고 불교의 진면목을 직접 접촉하도록 하자는 하나의 혁신운동을 펴신 것이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 원불교에 해주고픈 말씀은?

한석헌 선생은 그러셨다. 종교란 위대한 진리의 보화를 가득 쌓아놓은 궁궐과 같은 곳이 아니라고. 흔히 종교인들은 종교를 무엇이든 다 들어있는 궁궐로 보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퍼서 전달해주는 진리의 배급소 역항을 하려고 한다. 중세의 가톨릭이 그랬다. 구원의 모든 것은 가톨릭이 보관하고 있으며 신부는 미사를 통해 그것을 나눠준다고.

하지만 종교는 궁궐이 아니라 봄마다 새순을 내는 거대한 나무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씀하셨다. 끊임없이 물을 빨아올리고 광합성을 계속하지 않으면 어느 종교건 역사 속에서 굳어지고 경직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새순을 내는 일을 그치지 않아야 하는데 개신교는 130년 동안 너무나 일찍 고목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초창기에는 어느 종교인들 건강성이 없었겠는가. 미리 조심하고 경계하길 바란다.

 

p24

"수은이 애초에 동학을 내놓은 이유는 '각자위심(各自爲心)'에 빠진 세태에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운은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음과 어긋남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하늘을 섬기는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외면으로 향하던 욕망을 거두고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라고 하였다."

_ 고려대 김용휘 교수

 

p26

어지러운 시대, 사람공부로 천년성업을 _ 황풍년 월간 전라도닷컴 대표

"공부 많이 흐지 마라, 공부 많이 헌 놈들이 다 도둑놈들이드라...."하긴 공부라는 것이 그저 물질을 향한 끝없는 탐심을 채우려는 도구로 전락한 세상이 아니던가...많은 종교들이 이미 인간의 속물적 욕구에 비위를 맞추며 타락해가는 중이다. 패를 가르며 종파적 이해에 골몰해 분란을 야기하는 집단들의 패악이 끊이지 않고, 성직자들이 돈이나 자리를 놓고 추악한 암투를 벌이는 세태다. 이름난 예배당이나 큰 절집을 낒 않고는 정치하기 힘들고, 하다못해 동네 식당 하나도 신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단골이 되어줘야 한다.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와 부적이 상품처럼 팔리는 판이니 성속은 뒤범벅이 되었고 정신을 구제해야 할 종교 또한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꼴이 되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원불교의 성직자들이 유지해온 검박하고 깨끗하되 따뜻함을 잃지 않는 모습과 일체의 부패와 추문이 들리지 않는 고결한 종단의 이미지에 경외심이 인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정신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물질에 치여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오늘날,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킬 '사람공부'의 빛나는 화두다...사람과 국가의 시간음 10년, 100년 단위로 가늠하지만 문화와 종교의 시간은 1000년 단위로 계산된다고 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선각 위에 쌓은 백년 공력이 비로소 천 년 종교, 천 년 문명의 장을 연 셈이다. 나는 천 년 성업의 첫 걸음을 떼는 원불교가 기성 종교들의 몹쓸 전철을 결고 밟지 않길 바란다. 교세확장과 신도 늘리기 급급하기 보다는 '사람공부'의 정도를 천년만년 뚜벅뚜벅 걸었으면 좋겠다.

 

p28

원만하기로는 우등생, 혁신성은 낙제생? _ 백성호 _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저는  '머물고자 하는 원불교'를 종종 봅니다. 어디에 머물고자 하는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소태산 대종사'입니다. '대종사께서 이미 진리를 펴셨으니, 우리는 그 법에 다라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어차피 깨달음을 얻어도 그 법대로 사는 건데,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냥 대종사님 가르침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머물고자 하는 원불교가 종종 보입니다.

저는 그걸 '빨간 불'이라고 봅니다. 위험을 알리는 신호죠. 원불교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종사께서 법을 펴신 자리를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에는 어떠한 머무름도 없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대종사를 만나면 대종사를 죽인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대종사께선 법을 설하신 겁니다.

그럼 오늘날 원불교는 어떻습니까. 저는 그걸 묻고 싶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뭐랄까요. 너무 조심스럽다고 할까요. 아니면 너무 교리에만 순종하고자 한다고 할까요, 아니면 너무 모범색이라고 할까요. 그런 인상도 받습니다. 대종사께서 세상의 상식을 뜷으셨듯이, 원불교의 상식을 뚫으려는 내부의 시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입니다. 어쩌면 그걸 다소 '불경시'하는 모습도 느껴집니다. 그런 면에서 원불교에 파격과 혁신의 분위기가 아쉽기도 합니다...파격을 용납하는 분위기 말입니다. 그런 바람 속에서 '제2의 대종사', '제3의 대종사'가 끝없이 나올 거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p30

'간디'에게서 세상의 아픔과 함께하는 '종교'를 배우자 _ 최종수 _ 천주교 전북교구 농촌사목 신부

얼마전 인도순례를 다녀왔습니다. 15일의 인도순례의 목적은 간디와 그의 제자 비노바 바베 아쉬람 공동체 탐방이었습니다. ..민중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초심을 잃어버린 종교는 사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노바 바베는 인도 독립직후 인도 전역의 지주들을 찾아다니며 토지헌납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바베는 "공기, 물, 햇빛, 술과 산과 강, 땅은 지구의 유산이다. 그 누구도 어떤 집단도 저것들을 차지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59년 브라흐마드 비야 만디르 아쉬람을 세웠습니다.

두번째 아쉬람은 간디가 세운 세바그람 공동체였습니다. 세바그람은 밀림지역으로 700여 명의 불가촉 천민들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이 찾아와 함께 살기를 희망했습니다....물레를 돌렸던 움막 앞에서 간디의 생애를 축약한 '7대 사회악'을 만났습니다. 다시 보아도 위대했습니다. 7대 사회악을 읽어내려 가면서 뜨거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이후 예수님의 복음 전체를 이처럼 간결하게 요약하고 살았던 성인은 없었습니다.

1. 원칙 없는 정치  2. 노동 없는 부  3. 도덕 없는 상행위  4. 인격 없는 교육  5. 양심 없는 쾌락  6. 인간성 없는 과학  7. 희생 없는 예배

큰 교회와 성당, 사찰과 교당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 아파하는 세상과 함께 하는 종교는 얼마나 될까요. 원불교 100주년을 맞아 민중과 세상과 함께하는 종교로 거듭나는 원불교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비노바 바베의 유언으로 글을 마치려 합니다. "신의 정신인 사랑을 들이쉬고 그 사랑을 날숨으로 살아라. 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자각을 자연과 세상과 이웃 안에서 삶으로 실천하라."

 

p32

멀리 있는 착한 아이 대신 가까운 친구로 와주길 _ 강병융 작가, 번역가

원불교 주변에서 지내다 보면, 교무님들, 교도님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교육', '자선', '교화'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적어도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그저 좋은 이미지로만 남겨진다는 것이 종교의 본분인지 반추하게 됩니다.

원불교가 그저 '착하기만 한 아이'가 아닌 '착한 내 친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이름을 말하고,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갈 것인지를 말하면서 서로 친구가 돼야겠지요...원불교는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대중의 주목을 끌기도 하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이미 봄입니다.....모든 생명을 새롭게 깨워줄 그 힘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