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돌봄을 위한 창조 영성적 인간이해
논문개요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생태계의 위기 속에 극심한 불안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문제 제공자이며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목회상담은 인간을 돌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까지 어우르는 목회돌봄이 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현대인들이 겪는 모든 문제들-인간의 소외, 불안, 생태계의 파괴 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진정한 영성의 분실’에서 찾았다. 본원적 가치인 영성을 잃어버렸을 때 관계는 깨어지고, 부조화의 상태만이 남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간이 소외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 필자는 창조 영성적 목회 돌봄을 제시하였다.
오랫동안 기독교의 영성과 창조 이해는 이원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오염되어왔다. 지금까지의 영성은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내면적 수련이라 생각하여, 육체와 자연을 부정하며 세상과 격리된 모습이었다. 기독교의 전통 창조관도 인간 중심주의 속에서 자연을 지배 및 착취하는데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모든 것과 그리스도가 맺었던 관계를 맺는 것이고, 창조 이해 또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축복하심 속에 창조되었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살아 숨쉬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 영성이다.
p2
현대인들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영위한다.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 같은 편리함 속에서 인간들은 더욱 고독해지고, 소외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방황하며 헤매고 있다. 이는 인간이 참다운 영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삶의 터전인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체 피조물들의 생명 속에 현존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없이 인간의 영성은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
타락의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원죄 안에 옭아매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 축복, 은총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는 원죄적 인간의 모습과 더불어 잃어버린 “원축복적 존재”로서의 인간, 즉 창조 영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p3
본 논문은 잃어버린 영성의 회복과 생태계 위기 속에서 어떠한 가치로 인간을 이해할 것인가를 찾아간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이 제시하는 길은 창조 영성의 길이다.
p5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성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존 맥쿼리(John Macquarrie)는 영성을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이라 했고, 죠던 오먼(Jordan Aumann)은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구체화된 종교적이고 윤리적 가치의 총칭’6)이라고 정의했다. 어반 홈즈(Urban T. Holmes)는 영성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인간의 관계성 형성의 능력이다. 둘째, 그 관계 형성의 대상은 감각현상을 초월한 존재이다. 셋째, 이러한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나는 새로운 의식, 혹은 깨달음이다. 넷째, 이러한 만남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그 본질을 부여받는다. 다섯째,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그 무엇이다. 다시 말해 홈즈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여는 태도와 그 실천, 그리고 이것이 유발하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영성이라고 정의한다.7) 이전에 정신에 한정시켜 이해하던 영성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
영성이란 다차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둘러싸고 또한 구성하는 자연, 사회, 동료 인간, 신과의 교통과 만남 속에서 창출해내는 전인적 생명 약동이요 반응이다. 한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기독교적 영성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삶 속에,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그리고 이 세상 역사의 과정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입김을 심도 깊게 체험하면서 삶의 전 영역을 자유, 사랑, 공의, 평화로 변하게 하는 창조적 변혁의 힘”9) 인 것이다. 김경재,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 p. 93.
p7
기독교 영성은 결코 탈세계적인 영성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p9
홀로 명상하면서 기도와 은둔, 독거, 묵상, 노동, 침묵, 예배 등을 통한 영성훈련 역시 궁극적으로는 삶의 절반의 모습밖에는 담아내지 못하는 영성이었다. 중세의 영성은 초대 교회 이후 제도화되어 온 수도원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명상과 봉사와 가난이다. 이들의 영성 생활은 세상과 동떨어져 기도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우리는 영성 생활을 일상 생활과 따로 분리시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안에서 그 생활을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므로 세상 속에서 살면서 동시에 명상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2) 수도원의 영성 운동은 예배의 거룩함, 복종의 모습, 자기 통제의 인격적 숭고성이라는 공헌을 하였으나 반면, 세상과 격리된 경건을 추구하여 칩거적, 자기학대적, 병리적 모습을 지니기도 하였다. 또한 영적인 가치가 세상의 가치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도 하였다.23)
대체적으로 2세기말까지 초대 기독교 영성은 순교 영성과 묵시 영성으로 특징지어지고, 3세기부터 종교 개혁에 이르기까지의 영성은 수덕적, 신비적 영성, 수도원 영성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24) 그러나 진정한 영성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영성의 의미는 점차 사라지고 영성의 의미는 왜곡되어졌으며 점점 교리화, 제도화된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 개혁을 일어나게 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
p10
종교 개혁기의 영성운동은 기독교를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즉 교황 및 규칙에 얽매였던 것을 풀고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
하지만 종교개혁의 크나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 계시를 문자(성서) 속에 한정시킴으로써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다.25)
...
웨슬레의 영성은 ‘성화 사상’과 ‘완전 사상’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인간 속에 타오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완전에 이르
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의 영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영성이다.27)
...
이웃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신앙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영성은 진정한 영성이 될 수 없다. 오늘날의 영성 이해는 이같은 한계를 넘어선다. 영성은 개인적 심령의 함양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
구티에레즈는 영성을 인간의 현재적 상황에 정착시킨다. 연대성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서의 회개, 행동의 기초로서의 은혜, 고난을 극복한 승리의 기쁨, 가난한 자들에의 참여를 위하여 영적 어린이가 됨,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독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공동체를 통한 영성이다.
p11
영성은 공동체의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사막의 고독과 위험을 개척하면서 통과해 가는 민중의 순례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우리가 마셔야 하는 우물이다. 이러한 영성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약속을 앞당기는 것이다.31)31) 로버트 M. 브라운, 백상열 옮김, 『영성과 해방』,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0), p. 145.
...
창조 영성을 바탕으로 한 생태영성이다. 이것은 모든 창조물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외경심을 갖는 것이다.35) 세상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몸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몸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36)
p12
영성은 ‘관계’에 기초한다. 이러한 관계지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상생(相生)이 된다. ‘상생’, 즉 서로 살린다는 것은 자신, 이웃, 공동체, 자연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고, 이 세계에 부여된 은총을 인식하며,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희망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수직과 수평의 어울림이다.39) 성숙한 영성은 창조를 존중하며 우리가 감각을 통해 가지게 되는 창조에 대한 인식을 거룩함의 경험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창조 영성을 찾아가는 것은 수직․수평이 어울리는 상생이며, 이러한 관계 회복을 통해 치유적 상담이 이루어진다.
p13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사건 이전에 창조사건이, 인간 이전에 자연과 세계가 있어왔다. 우리가 인간을 이야기 할 때 먼저 창조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창조의 세계인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서이다.
p2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태신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독교의 창조신앙은 존재의 대긍정을 나타낸다. 모든 현존하는 것은 그 자리에 현존하도록 불리움 받은 은총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계층적 관계가 아닌 유기체적 상호의존적 관계라는 것이다.
p28
폭스는 서구 문명이 생명보다는 죽음을 더 사랑했던 이유를 서구의 종교전통이 창조보다는 구속을, 환희보다는 죄를, 우주적 인식과 감사보다는 개인의 내적 성찰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서구의 종교는 환희와 우주적 창조와 만물에 흐르는 창조주의 에너지와 근본적인 은총에 대해 침묵하는 타락 및 구속 영성에 빠져있었기에 죽음과 죽임의 문화를 양산했다는 것이다.91)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창조의 힘과 기쁨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창조 영성과 원축복에 대한 이해이다.
...
매튜 폭스가 정리한 창조 영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조 영성의 신앙은 신뢰이며, 여성적이고 미학적이며, 감정의 통제가 아닌 환희, 에로스, 감정의 축제이다. 또한 정열을 축복으로 보고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하나님, 아이로서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죽음은 자연적 사건이며, 죄에 근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에너지로서의 말씀과 함께 한다. 원죄보다는 원축복을 강조하며 생태학적, 우주적 가치관을 제공한다. 회개보다는 변화를, 과거와 미래보다는 현재를, 죄와 속죄보다는 감사와 찬양을 그리고 창조성을 강조한다. 희망으로 가득하며, 우주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p29
아씨시의 프란시스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 교통한 대표적 창조 영성의 실례를 볼 수 있다. 그의 삶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행복 그 자체를 위해서 살아야 함을 너무나 철저하게 몸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의 생태학적 희망을 구체적으로 육화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94) 프란시스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형제요 자매였기에 그는 동물들을 ‘형제’로, 새들을‘작은 자매들’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에, 프란시스는 고통받는 영혼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동식물과 무생물들까지 형제 자매로 사랑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영적 순례 보다 세상과 연대하는, 하나님의 피조물과 함께 하는 창조 영성이었다.95)
p31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현실에서 실존적 암울함을 나타내는 원인을 ‘집착’에 두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원축복과 창조 영성이 결핍되어진 인간의 마음은 이러 저러한 피조물들에게 사로 잡혀 있고, 이를 가리켜 집착이라고 말한다. 집착의 대상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가족, 세속적인 영예, 심지어는 ‘타인의 결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집착은 영적인 면에 해당되기도 한다. 즉 기도나 금식이나 철야 등의 영적 훈련에 대해서도 집착이 생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은 모두 자아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으며, 우리가 세상의 것들이 나 자신과 밀접하게 연관이 지어졌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내 것’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세상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의 두 번째 의미는 노예 상태 또는 구속의 상태이다. 에크하르트는 집착이 소유자로 하여금 오히려 소유된 상태에 있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주체는 더 이상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노예처럼 집착에 의하여 구속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의 집착의 의미보다도 집착의 진정한 의미는 단지 어떤 것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과 소유물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 하
는 것이다. 자신과 세상의 것들을 ‘마음속에서’ 연관시키고 있는 한, 그는 그것들에 대해 집착하게 된다. 즉 사물이나 사람, 환경 등에 집착된 상태에 있는 인간은 분노나 기쁨, 열정 따위에 예속되기 쉽고 그럼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여하게 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근원으로의 회귀이며 방법론적으로는 ‘가게 하는 것(letting go)’과 ‘스스로 있게 하는 것(letting be)’이다. 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착들에서 떠나 갈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초탈의 결과로 주체와 객체는 동시에 자유를 누리게 된다. 즉 우리가 대상에 더 이상 몰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즉 아무런 감정이나 형상이나 추리나 판단이 일체 배제된‘있는 것을 있게 하는’ 무심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근원인 신성에로 회귀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방해가 되는 모든 이미지나 형상, 지성, 감성 등을 초탈하는 것으로 신성으로 가게 하는 것이며 있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폭스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사실 가게 하는 것(letting go)은 우리를 만물의 신성 뒤에 숨어 있는 신성을 보게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가게 하는 것의 경험은 있게 하는 것(letting be)을 경험하는 데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며, 신성을 신성 되게 하는 것이며, 만물을 만물 되게 하는 것이다.”101)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은 무언가를 더하므로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빼기의 과정으로 근거한다.102)”고 주장한다. 참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존재가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심연, 절대 침묵, 순수 영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와의 온전한 합일을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도 자기 비움 자기의 무화, 자기의 부정 또는 자기의 포기를 통한 영혼의 순수화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영혼의 자기 비움을 위해“가게 하는 것”과 “있게 하는 것”을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초탈”이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p37
연민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래에서 하나이다. 때문에 연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동격인 우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다른 이들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되는 것이다.
...
연민은 동정(pity)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분리될 수 없는 ‘함께’(together)라는개념이고, 후자는 상호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 그 근본이다. 동정의 대상도 고통받는 이와 약자, 열등한 이를 포함하지만 다른 이의 고통에 참여하는 정도가 연민보다 약하다. 동정은 남을 동정함으로써 자기가 만족하는 ‘감정적인 사치’이지만 연민은 다른 이의 약함이 아니라 다른 이의 약함을 나누는 것에 대한 자각을 근본으로 한다. 연민은 고생하는 사람과 ‘더불어’, 또 그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음으로써 고통을 이기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참여할 생각은 없이 그들을 동정한다는 것은 헛된 감상일 뿐이다.124)
...
성서는 연민을 감상으로 치우치게 만드는 것에 저항하고, 철저히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집 없는 자를 안주케 하고, 속박된 자를 자유케 하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아픈 자를 돌보아 주고, 죽은 자를 매장해주고, 무지한 자를 교육시키고, 혼란한 자를 상담해주고, 잘못된 자를 훈계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감싸주고, 용서하고, 평안케 하고, 기도를 해주는 등은 연민에 의해서 이끌어진 자비의 실천인 것이다.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고통, 속박 등 이 모든 실질적인 고통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다른 이가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연민은 자기중심화 하려는 힘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연민은 다른 이의 고통에 방관하게 만들고 감상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p42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서의 존재가치 보다는 축복 받고 기뻐함을 입은 존재로서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 이는 창조 영성적 인간 이해의 주된 목적인 것이다.
칼 로저스의 인간 중심적 접근 방법은 이러한 기독교 정신과 매우 유사하다.
로저스는 인간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 로저스는 인생의 목적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 또는 ‘훌륭한 삶’이라 했으며, “훌륭한 삶이란 인간 유기체가 내적으로 자유로울 때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어떤 보편성을 지녔고... 고정된 상태가 아닌 과정이며 목적지가 아닌 방향”136)이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은 자원을 가진 존재로서 자기 지시(방향화)가 가능하며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로저스는 마치 씨앗이 성숙한 식물로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의 자아실현도 적절한 환경 하에서 성장한다고 본다. 이를 위한 무조건적 긍정137)과 필요 충분한 공감138), 그리고 일치139)는 인간을 치료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상담은 자기의 내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는 대화의 과정인데, 상담자는 타인의 파괴적인 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감적 이해와 무조건적인 긍정적 배려를 가지고 그 문제를 중재한다.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