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월

마음세탁소_황웅근

여행길 2013. 6. 21. 11:58

마음세탁소_황웅근_정신세계사 _2013


p27

단지 우리의 삶이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는 뚝 떨어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껏 고민했던 삶의 문제가 즉시 해결된다. ...그 선택이 내게 달렸다면?


p29

무너진 그 행위 자체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고 비하하려는 마음이다. 현실엔 없는 이상형을 내세워 스스로를 부정하고 공격하면 내가 갈 데가 어딘가.

자책에 빠져 자기를 공격하기보다는 진솔한 반성을 통해 새롭고 아름다운 변화를 시도해봄이 마땅하지 않을까?


p32

감정에 복받치고 원한에 휩싸여 있는 나자신 역시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조차도 환상의 인물일지 모르는데 그런 나가 머릿속으로 파악한 그의 실체는 무엇인가

내가 그리는 그사람은 없다.

그가 그리는 나 역시 없다. 


p37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되고, 마음이 흐트러지면 마음을 비우고 순리대로 살면돼요. 늘 물이 있기에 목마를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항상 진리가 우리 곁에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 마음이 흐트러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p37

나는 내 존재의 시작점인 출생과 내 존재의 끝점인 사망에 대해 본질적으로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록 내가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몸으 ㄹ움직인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이 흐르도록 하는 근본 바탕, 내 몸을 구성하는 원소마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바탕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나의 자율적인 권력이 과연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들은 내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이 강력한 착각은 내가 뭔가를 가질 수 있다는 화려한 착각으로 변질된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건만 재산, 사랑, 며예, 지식 이 모든 것들을 가지려고 한다. ...누릴 순 있지만 원천적으로 가질 수는 없는 것들이다. ....

괜찮다. 

그럴 수 있다.

속아 줄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의 눈과 생각을 속여 가상의 현실을 창조한 영화는 오히려 우리가 지닌 착각을 잘 활용하여 우리의 삶을 맛깔스럽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속아주면 해결된다.

져주면 된다.

단지 착각임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때부터 우리의 삶에는 경쾌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p41

내 일하나 감당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언제 남에게 충고하고 남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하겠는가.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오해다. ...

광활한 이 세상, 날마다 변화하는 이 공간에서 내가 일할 곳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러니 내 감정이 좋아하는 일을 좇기보다 내게 주어진 일부터 해보는 것이 바른 순서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에 잡히는 일부터 하다 보면 저절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내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렇게 욕심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함과 경건함으로 임해보노라면 그 일이 점점 숙달되면서 능률도 오르고 재미도 생긴다. 그 일이 곧 천직이다. 


p43

조금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 생각은 오해다. 손해를 봐야 제대로 마음을 잡을 수 있고 크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손해 역시 이익을 위한 밑천이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생각을 한다면 손해가 두렵지 않고 선택 또한 힘들지 않다. 

물론 선택을 함에 있어 충분히 헤아리는 것은 좋다. 특히 부정적인 특면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선택 이후릐 마음가짐이다. 더 이상 선택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내가 선택한 사항에 집중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잡는다면 비록 잘못 선택해서 손해를 보더라도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p45

나는 마음병 치료 초기에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환우에게 수양을 강조할 뿐, 나는 제대로 수양하지 않았다. 환우의 마음병이 완치될 리 없었다. 그 후,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내 마음의 평화에 힘썼다. 

환우의 마음병이 얼마만큼 호전될 것인가에는 관심을 줄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환우들의 완치율이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내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를 아는 순간 오해로부터 벗어난다. 내게 있는 근원적인 욕구를 모른채 엉뚱하고 불필요한 욕심을 좇는 것, 나 스스로는 수양치 않고 타인만 가르치려고 하는 것, 그건 분명 오해다. 


p48

아이들은 생각이 번잡하지 않다. 다툰 날 저녁, 동생은 마음이 켕기는지 글을 써서 언니 책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스스로 모든 문제를 종결시켰고 언니 역시 한숨 잔 것으로 이미 좋지 않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난후였다. 그러니 다음 날 아침에 사과문을 본 언니의 눈에는 철자와 맞춤법의 문제만 보일 수밖에.

이에 비해 우리 어른들은 참 복잡하다. 한 번 다투면 감정의 앙금을 털어내지 못하기 일쑤다. 


p49

내 아픔만 이해받기 원하고 남의 아픔을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병이다. 타인의 사정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인정받으려는 사고방식은 실제로 몸을 더 아프게 한다. ...

의사와 환자가 서로 밀약하고 의존만 하는 관계에서는 마음병이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심의들은 이런 의존관계를 단호히 끊는다. 의존은 자기를 수양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부분으로만 끌고 간다. 그들은 내 마음 좀 알아달라는 환우들의 절규를 단칼에 자른다. 

"그 마음은 똥덩어리에 불과해요"

심의들은 환우 자신도 모르고 있는 그의 더 깊은 속마음을 세심하고 따뜻하게 헤아려준다. 반드시 스스로 먼저 수양하면서 환우들로 하여금 좋지 않은 습관을 떨쳐내고 마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내 처지를 한탄하면서 내 입장을 알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여봤자 고작 잠깐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

남을 인정해야 나 역시 상대로부터 내 넓은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법. 만일 남을 먼저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만 인정받고자 한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남이 나를 인정하지 못하도록 결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p52

강박심리는 착각 무지로 시작해서 욕심과 고집으로 귀착된다. 무지란 어떻게 살아야 바른길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착각은 자기만의 생각에 취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요 욕심은 내 실적보다 기대치가 높은 마음이며 고집은 바른길을 일러줘도 듣지 않는 마음이다. 


p53

그려려니 하고 져주면 돼요. 그럴 수 있다 라고 말이에요


p54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를 비롯한 주변 어떤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근황을 알리지 않았다.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스피노자 처럼

나는 작고하신 지 1년 만에 유언에 따라 발간된 선생님의 유고 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윤성근 저, 마음산책 간)에서 선생님의 뜻을 엿보게 되었다.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었다. 운명은 내가 A라를 길로 가고 싶어했을 때 C라는 알 수 없는 길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그리될 줄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비록 그것을 잘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하고 ,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뭐, 그러다 보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운명의 내방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P59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의 소우주예요. 그런데 어찌 무시당할 수 있죠? 우리는 절대로 무시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에요. 내가 참된 나, 더 큰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드러난 나에 집착하며 남들의 얘기에 영향받는 거죠

...만일 백만원을 소매치기 당했다면 매우 화가 날 거예요. 그러나 천억대 부자라면 어떨까요?

그야 뭐 아무것도 아니겠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거예요

그래요. 더 큰 나를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남이 내 인생에 개입하고 나를 무시한다고 예민해져요. 더 큰 나는 타인의 무시로부터 자유롭죠. 더 큰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영향받는 거예요. 

지금 느끼고 있는 나는 본래의 나에 비해서 1억분의 1도 되지 않아요. 더 큰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남의 시선과 무시로부터 편해질 거예요. ..


어떻게 하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까요?

우리의 본성대로 살아가면 되죠. 맡은 바 최소한의 일을 완수하고 비방이나 화풀이, 불평, 불만,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내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나요?


P60

성현의 말씀의 핵심은 인의예지라는 사덕이다. 사덕은 통찰의 영역으로서 나만의 생각과 구분된다. 사덕은 곧 이성이다. 

이성은 삶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선한 생각이다. 내가 선해지는 만큼 타인에 대한 불필요한 경계심이 없어진다. 따라서 사람을 믿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

악하고 예의 없는 사람을 보면 자꾸 화가 나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제가 살아가기에 너무 힘들어요

그것은 성장기에 한때 왜곡된 환경에서 잘못 입력된 정보죠. 이 세상을 악한 사람들이 지배할 수는 없어요. 특히 정신적인 문명이 점점 증대되고 세계적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진행되는 현대 사회에서 선하지 않고, 예의 없는 사람들이 설 땅은 없죠. 마음공부를 통해 내가 먼저 선한 마음을 자져보도록 해요. 내가 선해지는 만큼 삶에 대한 믿음과 배짱이 생겨날 겨예요


P61

다른 사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가 어려운 것은 진짜 현실이야. 난 돈도 없고, 차도 없고, 배우자도 떠나갔잖아


이것이 곧 자기만의 생각이다. 내 생각이 선하지 않기에 내 생활이 어려워진 줄 모르고 그것을 현실 탓으로 돌린다. 이것은 의심이다. 이에 비해 의문은 내 생각을 뛰어넘는 이성의 영역이다. 의심은 나를 가두지만 의문은 나를 성장시킨다. 위의 의심을 극복하고 다음처럼 건전한 의문을 일으켜보자

과연 돈과 차와 배우자를 제외하면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 세 가지가 지금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가질 기회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믿음이 형성되면 아무리 삶이 고단할지라도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집중력이 향상되어 결국 내가 뜻한 바를 이루고야 만다. 구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씨앗이 있다. ...

나만의 생각에서 벗어나, 삶과 사람에 대한 크고 아름다움 믿음을 얻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자기를 수양하면서 꾸준하게 선한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굳건한 믿음이 형성된다. 그러한 믿음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깨지는 법이 없다. 

참된 믿음은 우리 삶의 토대요. 희망의 어머니다.

믿음을 얻게 되면 걸릴 것 없이 편안하다.


P64

내가 귀하다고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고

자기가 크다고 해서 남의 작은 점을 업신여기지 말며

용맹을 믿고서 적을 깔보지 말라

<명심보감> 정기편


선한 일을 보거든 목마른 듯하고, 악한 일을 듣거든 귀먹은 체하라

또 이르기를 선한 일은 반드시 탐을 내며, 악한 일은 즐기지 말라

<명심보감> 계선편


P65

내가 경찰이나 판사라면 악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찾아내야겠지요. 그러나 악은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응징하려 애쓸 필요는 없어요. 그건 불필요한 간섭이죠. 내 자리에서 내 책임을 다하며 선하게 사는 것이 곧 악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길이에요


P70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

이런 시각에서 살펴보면 비록 내가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느낌이 아무리 생생할지라도, 또한 탄생과 성장과 소멸이라는 위대한 자연의 질서가 아무리 분명한 현실로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실재가 아닐 수 있다. ...

설령 절대적인 실체로서의 현실세계가 존재한다고 치자. 그러나 이 또한 개인적인 주견에 따라 매우 주관적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기에 정확한 감지가 불가하다. 따라서 사물의 실체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초월하여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결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결국 현실세계란 수없이 왜곡될 수밖에 없고, 어쩌면 영원히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곧 현실세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다를 바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라고 하여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

이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사물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서 무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공평무사한 삶을 살아간다. 더 이상 자기를 과시하거나 주장할 필요가 없기에 선한 사람이 된다. 


P74

극단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심적 고통이 가중된다면 현실을 빈곤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이 빈곤할지라도 이를 풍요롭게 해석한다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이 마음의 평화는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발판으로 작용한다. 


P75

열등감은 내게는 열등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오만한 생각의 산물이다. 내게 부족한 면이 있어야 겸손해질 수도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법. 그래야 타인의 허물을 용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열등한 점을 인정하는 그 마음이 곧 우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점을 활용하면 장점이 되고 장점에 빠지면 단점이 되듯이

나를 선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내 적이요

나를 악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내 스승이다.

<명심보감> 정기편


P76

무슨 문제든 어떤 단정도 삼가고 무한히 열린 시각으로 접근할 때 치지에 이르게 된다. 치지가 체득되면 나머지를 모두 하나로 꿸 수 있다. 성의란 성현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집중력이라 볼 수 있으며, 정심은 사물에 대해 자기 생각대로만 단정하지 않는 마음이다. 치지가 되면 내가 마당히 실천할 바로서의 수신으로 이어지며, 그 뒤로는 저절로 이뤄진다. 


P77

비록 고달파 보이는 삶일지라도 얼마든지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기에 유가에서는 이 꿈과 같은 현상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길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도가에서는 나와 내 욕심의 허망함을 설파하여 텅 비워 살도록 계도했다. 불가에서는 성불을 위한 끊임없는 수양을 강조했다. 

이런 삶으 해석은 유가는 인, 도가의 무위자연, 불가의 공을 낳았다. 그 모든 정의를 총괄한다면 우리의 삶은 곧 수행의 발판이요, 도를 깨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내 생각이 좁을 수록, 삶에 대한 해석이 편향될 수록 부정적으로 바라 볼수록 내 감정이 엉키고 삶이 고단해 진다. 그러니 현실과 비현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에 앞서 내 마음이 평화롭도록 내 삶에 도를 적용해서 전향적으로 해석해 봄은 어떨까?

어찌 아는가

나를 괴롭혔던 해묵은 난제들이 단숨에 해결될지...


P81

해골바가지로 물을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본질적으로 보면 해골바가지 역시 물을 떠 먹을 수 있는 움푹 파인 용기에 불과할 뿐, 어떤 문제도 없었다. 대사는 괴로움의 본질은 사물이 아니라 생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일체유심조) 는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이 명제는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죽음 만큼은 현실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언젠가 우리 눈앞에 닥쳐올 죽음은 엄연한 현실이니까 일이다. 

아 그러나 그것 역시 나만의 생각이었다. 강바기의 견해였을 뿐이었다. 사는 동안 강바기는 줄곧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죽음도 해골바가지처럼 흉악한 무엇으로 착색한다. 그리고 자기의 견해를 단단히 부착시킨다. 죽으면 절대로 안돼라고

그러나 깨치미는 안다. 우리가 이미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죽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어찌 죽을 것을 걱정한단 말인가.


P82

선생님 삶이 참 공허해요. 그래서 더 이상 의욕도 없고 살고 싶지 않아요 모든 게 결국 끝날 것인데 열심히 살아서 뭐하죠

맞아요 삶은 공허해요 결국은 끝이 나니까요 그러너데 왜 그것이 문제죠?

공허하니까요

공허해서는 안 되나요?

네, 그건 글쎄요. 공허해도 되는 건가요?

삶이 꽉 차 있으면 오히려 숨이 막히지 않을까요? 공허하니까 그 안에 뭐든 담아낼 수 있는 거예요. 지금 힘이 든 것은 삶이 공허하다는 이치를 깨쳤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공허해서는 안 된다. 는 강박 심리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죠. 공허하다는 생각에 막혀 답답해진 것이지 공허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예요. 공허하다고 여기는 그 생각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예요

...

물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존재한다. 춥고 배고프지만 거처할 곳과 먹을 것이 없는 상황,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상황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한 상황이 아님에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끼는 것은 현실적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다. ...

생각의 안개가 걷히는 순간. 최악의 상황을 최상으 시나리오로 바뀐다. 극단의 상황이 해소되고 꿀맛 나는 세상이 펼쳐진다. 

바람 맞으며 조깅하기, 소낙비에 발 적시기, 땀 흘리며 등산하기, 개울에서 목욕하기, 눈밭에서 굴러보기, 취미가 같은 사람들과의 담소, 책을 통해 동서고금을 넘나들기, ...아침잠의 달콤함...아 어디 이뿐이겠는가.


P85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이 욕설임을 알면서도 그저 일종의 무늬나 그림으로 파악함으로써 현상에 휘둘리지 않는 게 곧 깨침이다. 

깨침이란 냉철한 이성 영역이다. 이성적으로 살피는 것을 통찰 혹은 직관이라 한다. 통찰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임, 직관은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을 배제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같은 의미다. 통찰이나 직관을 통하여 현상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신의 생각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깨침이다. ...

깨침은 일상의 소소한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새롭고 정확한 인식의 변화이며, 깨달음은 인생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좀더 근본적인 변화다. ...

깨달음도 이와 같다. 깨달음은 오리가 백조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백조 였다는 진실을 깨치는 것이다. 


P88

깨달음 전 

마음 주체 :  칠정(강바기)

인생견해  : 죽음은 삶의 적이고,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요, 인생은 문제투성이다. 

대인관계 : 그 사람이 잘못해서 내 삶이 불행하다.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해서 우울하다.

생활습관 : 불만과 원망, 불안이 잦고 쉽게 상처를 받는다. 


깨달음 후

마음주체 : 본성(깨치미)

인생견해 : 죽음은 또다른 삶이고, 이 세상은 편쳐진 잔치상이요, 인생은 놀이터다

대인관계 : 짜증내는 그 사람을 품는 내 삶이 아르답다. 내가 우주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기에 평화롭다.

생활습관 : 감사와 만족, 감동을 느끼며 믿음과 배짱이 생겨난다. (주체적 삶)


P89

모든 심리적인 문제는 반드시 깨달아야 근본적인 해결이 된다.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내가 없음을 깨치는 것이다.

자기수양을 통해 무한히 생각을 확장해 나가면 우주적인 나를 찾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결국 비존재로서의 나없음에 도달한다. 이것이 곧 도통이요, 깨달음이다. 진정한 해탈이요, 참된 구원이다. 극기복례요, 본성회복이다. 

이 자리에는 욕심이 개입할 수 없다. 이미 다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없음으로 인해 내 마음의 상처도 소멸한다. 공격성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선해진다. 욕을 먹거나 모함에 휩싸일지라도 그에게는 종달새가 노래하는 정도로 들리기에 결코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진한 삶의 희열이 느껴진다. ...

수양하지 않으면 사물의 본질인 공허를 볼 수 없다. 공허는 '가득 참'의 극치다.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것을 보아야 칠정과 집착이 끊어지면서 선악을 초월한 지극한 선이 발현된다. 이것이 인의예지신이라는 본성이다. 

이때부터 사물에 대한 존재인정이 가능해진다. 더 이상 자기만의 생각에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없다. 

꾸준한 자기수양을 통해 나만의 착각에서 벗어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본성을 회복하여 선하게 살아가는 것, 이렇게 평범하고 단순한 모습이 깨달음의 실체이고 전부다. 

그러나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외부환경에 의해 일희일비하는 생활로부터 졸업한다. 내 인생 최고의 통쾌한 반전이 시작된다. 


P102

누구라도 성현의 말씀에 근거하여 겸허한 마음 자세로 간절히 구하면 이성이 발휘된다. 


P103

본연의 자리를 찾아줌으로써 죽음에 초연해지고 마음의 편화를 얻는 것이 신앙이 본질이죠. 이를 바탕으로 사랑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마음을 지니게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죠. 이미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죽음 이후에도 생존하겠다는 것은 난센스이며, 착각이고 욕심의 발로일 뿐이지요


P105

달마대사는 텅 빈 본연의 자리와 하나가 되었다. 그는 모를 줄 알았다. 그렇게 본연의 자리는 어떤 규정과 평가도 불허한다. 감히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할 수 없는 고유성이 유지된다. 진흙 속에 던져진 구슬이 진흙에 의해 더러워지지 않듯이, 비극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삶이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그 배우는 편안하듯이 본연의 자리는 외부의 상황과 상관없이 안전하고 평화롭다. 


P112

우리의 몸이 땅을 딛고 하늘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어딘가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그 의지처가 곧 신이다. ...신은 곧 더 큰 나요, 보다 더 근원적인 나다. ...

신을 아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길이요, 신을 만나는 것은 참된 나를 만나는 것이다. 신을 만나기는 매우 쉽다. 오직 겸허한 자세와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충분하다. 신의 속성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곧 신을 만나기 위한 최고의 명상이요, 가장 간절한 기도다. 


P115

깨치미는 내가 죽어도 내 후대를 생각할 줄 아는 박애주의자요, 낙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나 하나를 넘어 인류의 존속을 꾀하며, 심지어 인류와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충실히 사는데 관심을 쏟는다. 

실제로 깨치미는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종말에도 뭔가 이유가 있고 장점이 있지 않겠냐고 믿는다. 영원한 것이나 종말이나 본질적으로 별 차이 없다고 인식한다. 

...

깨치미의 속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곧 인정하기다. 태어나도 좋고, 소멸해도 괜찮다. 극한의 한계상황마저도 인정하고 흡수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이 마음을 옛사람들은 천리본성이라고 불렀다. 하늘의 이치가 아니라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상세계에 더 잘 빠진다. 강바기가 힘쓰기 때문이다. 강바기는 불확실한 것, 애매모호한 것, 껄끄러운 것, 미완성이 세계에 대해 매우 예민하다. 강바기는 무언가를 규정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 ...

강바기는 순간의 이득과 쾌락을 추구하는 각종 유혹에 쉽게 걸려든다. 그래서 일을 그르치고 사람들과 다투기 일쑤다. 그러나 깨치미는 냉철하다. 결코 순간이 쾌락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일을 멀리 도모할 주 ㄹ안다. 

강바기는 들떠 있지만, 깨치미는 차분하다. 강바기는 걸핏하면 부정하지만, 깨치미는 항상 인정한다. 그는 무엇이든 사랑한다. 사랑만이 해결책일 줄 잘 이해한다. 그가 있기에 우리는 모진 세파를 극복하고 온갖 걱정과 근심을 초월해서 잘 살아간다. 


P124

우리 삶에는 아름다운 죽음의 파티가 날마다 열리고 있다. 불필요한 생각의 짐 내려놓기, 양보와 겸손, 담백한 졸업과 이별, 후회 없는 포기아 휴식 등의 심리적인 죽음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무소유의 덕목을...


P126

아는 사람은 단정하지 않고, 단정한느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도덕경>


P130

아름다운 부부관계로 살기 위해서는 애증으로 맺어진 부부의 틀을 넘어서야 해요. 부정적인 감정을 앞세워 상대를 응징하려 든다면 가정이 비극적으로 깨지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도 있어요..선생님께서 이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니, 몰랐던 일로 여기시고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아내를 존중해주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우리 마음이 예쁘고 멋진 풍경에 이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만일 부인께서 꽃동산에 놀러 가서 꽃향기를 맡고 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일로 질투하지는 않잖아요. 단지 그 대상이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요. ...

누구에게나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영역이 존재한다. 몰라야 할 영역은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이 곧 상대에 대한 존중이고 배려다. 배우자라면 더욱 이를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무의 뿌리는 흙으로 잘 덮어줘야 잘 성장하듯이, 상대만의 고유한 영역과 비밀을 잘 지켜줘야 한다. 


P132

사물의 이치를 깊이 궁구할수록 모름의 영역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왜 사는지 모른다.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역설적으로 모를 줄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옛 현인들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하지도, 그렇게 대하지도 않았다. 항상 겸허했고 예법을 지켰고 자기가 맡은 최소한의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비폭적젹이었고 민주적인 삶을 살았다.

모름의 세계가 있기에 강바기가 형성한 생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다....모름의 세계와 본연의 자리는 상통한다. 

...모름의 영역은 우리 영혼의 허파다. 죽음과 더불어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가장 신비로운 선물이었다. 아자!


P136

어쩔 수 없다.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마음, 이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아예 삶이라는 경기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병과 건강, 요절과 장수, 부귀와 빈천은 개개인마다 매우 불평등한 요소로 보이지만 결국 생로병사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모든 게 그렇다. 당장 눈앞만 살피면 큰 차이가 나지만, 크게 바라보면 근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또 설령 그것이 불평등하다고 치더라도 삶이라는 이 게임에서는 불평등보다는 평등이 훨씬 더 엄격하고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다. 특히 자기수양이라는 주제는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하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피한 사람이 아니라 불행을 껴안은 사람이다. 겸손한 만큼 만족할 수 있고 , 자기를 비운 만큼 커질 수 있으니 얼마나 평등한 일인가.


P138

공자께서는 죽음을 받아들였고, 죽음을 감수했으며, 죽음과 다투지 않았다. 큰 시각으로 보았기에 죽음을 문제로 삼지않았다. 그러기에 삶의 가치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인류의 큰 스승이 되었다. ...

달동네의 아픔이 곧 해동네의 기쁨이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모른 채. 문제는 그저 문제가 아님을 모른 채,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그 문제를 적대시하면서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143

아버지는 어찌해서 어머니를 붙잡지 않으세요?

너의 엄마가 따라간 사람은 '또 다른 나'다 내가 어찌 반대를 하겠느냐?


p144

오직 내 욕심만 챙기고 이해받으려고만 하는 마음이 더욱 나를 외롭게 한다. ...해와 달과 별과 하늘, 바람과 물과 공기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함께한다. 온 우주가 내 존재를 받쳐주고 있다. 어찌 내가 홀로 일 수 있겠는가.


p148

이 역시 더 크게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총명한 사람도 어리석게 대처할 때가 있고, 철저히 준비해도 성과가 없을 수 있다. 이 역시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해서 악을 조장하는 이야기로 들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사를 대한다면 비폭력적이고 선한 사람이 된다. 오히려 모든 악은 그래서는 안 된다.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한다. 

물론 어떤 특정한 조건이 설정된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명제가 허용된다. 예컨대 마음의 평화를 위한다면 반드시 자기수양을 해야 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그렇다. ...

그러나 이와 달리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악하기에 다스려져야 한다. ...

부담감, 귀찮음, 중압감이 올 때는 어떻게 하죠?

그 역시 그럴 수 있지 않은가요? 그런 감정들을 기꺼이 감수하면 그 뿐이에요. 거부하지 않는다면 다툴 일도 없지요. 다투지 않으면 그 감정이 증폭되거나 내가 그것에 매몰되는 일이 생기지 않아요.


p151

자기의 목숨을 지키는 일, 내 삶에 충실한 것이 하늘에 대한 바른 자세요. 그것이 곧 의로움이다. 맹자께서는 목숨에 전전긍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경시하지도 않으셨다. ...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면 고집과 욕심이 끊어지면서 비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결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라는 견해는 평화를 부르는 크고 유연한 생각이다. 사덕의 핵심이요 본성의 향기다. 


p154

참된 나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진짜 나는 나 없음, 곧 무아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곧잘 현상의 나, 형체의 나를 진짜 나로 착각한다. 누군가가 좋지 않은 말을 하면 발끈한다. 

만일 누군가가 내게 폭력을 쓰려고 하면 정당방위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경찰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

살다보면 나를 영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법. 그러므로 우발적으로 빚어지는 오해는 내버려두는 것이 이롭다. 

오해를 풀려고 변명과 설득, 주장을 하다 보면 오히려 상대의 새로운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착각과 오해가 난무한다. 제일 높기로는 착각이라는 산이요, 가장 깊기로는 오해라는 바다다. 현재도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요, 미래도 그럴 것이다. 어찌 오해의 근원을 모두다 캘 것이며, 또 어떻게 일일이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쩔 수 없다. 내버려 두는 게 현명하다. 더 이상 대응치 말고 무심하게 내 일을 충실히 하는 편이 현명하다.


p156

그래요, 그 이유만으로 충분해요.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용서하고 포용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요. 싫든 좋든 그것이 내 인생이니까요

우리 삶은 생로병사처럼 본질적으로는 선택하기보다 선택되어 지는 일들, 어쩔 수 있는 일보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의 권능에 대해 감히 평가하거나 대적할 수 없다. ...

어쩔 수 없는 것들과 싸우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포기다. 이미 이루어진 일과 지난 일에 대해서 말하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에너지를 불필요한데 쓰지 않게 되고 집중력이 향상된다.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활 에너지 저장소는 방전형에서 충전형으로 바뀐다. ...

쇠고기 맛이 좋아도 모든 사람의 입에 맞출 수는 없는 법. 그땐 어쩔 수 없다. 상황을 인정하고 감수할 수밖에


p162

해동네는 화려한 만큼 공허하고, 달동네는 텅 빈 만큼 옹골차다. 별 차이가 없을뿐더러, 설령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오십보백보다. ...

그렇게 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해동네가 오든지, 달동네가 오든지 상관치 말고 오직 내가 처한 자리에서 그 순기능을 찾아서 내 삶을 즐기는 자가 현명할 뿐이다. 별 차이가 없는 세상살이 기왕지사 즐겁게 사는 게 좋기 때문이다. 


p164

나를 먼저 사랑할 것인가, 남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는 덜 중요하기에 말단이다. 나를 먼저 사랑해도 되고 남을 먼저 사랑해도 된다.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근본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말단이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이란 없다. 반드시 근본에 힘을 쓸 줄알아야 말단이 다스려진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라 <논어> 학이편 


p168

정답은 곧 인의다. 내 욕심만을 따라 당장의 이익과 실리만 추구하는 게 말단이며, 인의라는 본성을 따라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래서 군자는 늘 근본을 굳세게 세우기를 힘쓴다. ...

성공하느냐 실패하는냐, 사느냐 죽느냐 따위로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것도 말단이다. 어떻게 수양하며 살아갈 것이고 어떻게 제대로 선을 행

할 것이냐가 근본이다. 


p172

내 판단을 내려놓으면 참된 시와 바기 보여요. 이것이 유가의 뜻이지요. 불가에서는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라는 뜻으로서 시비를 따지지 말라고 한 것이니 그 근본은 일치하는 거예요


p180

관심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운상태로 성현의 말씀(마음세제)을 듣고 읽고, 쓰고 외울 때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 특히 외우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된다. 반드시 구절을 외워야 성현의 글귀가 머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잡생각이 씻어진다. ...

다만 이 관심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실천사항은 내가 맡은 최소한의 일을 수행하기와 비방하지 않기다. ...

세상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며 또 다양해야 한다. 마음을 관찰하는 데도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 세상과 우주와 나와 사람의 마음을 딱 하나의 잣대로만 재겠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병적 생각이다. 


p185

기쁨, 분노, 슬픔, 걱정, 두려움, 집착, 애정, 미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악이 될 수는 없다. 의라는 본성의 단서는 수오지심이다. 이는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볼 때 부끄러움과 미움을 느끼는 선한 감정이다. 그런 미움은 내 마음과 몸에 건강한 에너지로 작용한다. 이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상대를 부정하며 불평가 불만을 토로하는 병적인 미움과 구별된다. 

본성을 요즘 언어로 해석한다면 인은 존중과 포용, 의는 반성과 경계, 예는 양보와 겸손, 지는 만족과 감사, 신은 믿음과 배짱으로 볼 수 있다. 


p188

죽어야 할 것은 나가 아니라 나의 오만한 생각이다. 자살해야 할 것은 내몸이 아니라 내가 가진 편협하고 그릇된 강박심리다. 


p197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혔다면 기대치만 잔뜩 높여서 사치스럽게 살아간다는 증거다.


p204

그렇다. 내가 없어져야, 내 의식을 초월해야 강바기로부터 자유로 울 수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곧 강바기를 부르는 초정장이다.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헛된 자아도 강바기의 훌륭한 먹잇감이다. 제아무리 칠정의 나를 위장할지라도 녀석은 반드시 찾아내어 기생하고야 만다. 

그러나 제 아무리 고집과 욕심, 그리고 집착이라는 증상을 지닌 강바기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화로워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명제와 어떤 삶이 내게 참된 유익을 주는가?라는 합리적인 의문 앞에서는 즉시 무력해진다. 이곳에는 녀석을 먹여 살리는 편견과 무지, 그리고 착각이라는 필수 영양소가 없기 때문이다. 


p205

마음을 비운다는 뜻은 더 이상 나라고 불리를 강바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 것과 같아요. 남의 비방을 당할 일이 없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요. 소멸의 공포에 휩싸이지도 않죠.


p206

어떻게 통찰력을 길러야 할까?

성현의 말씀 암송하기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

이것이 곧 비결이다. 


p216

대부분의 우울감은 정당한 욕구가 해소되지 않아서 나타난다. 배고픔이 병이 아니듯 우울감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사랑과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발산하지 못한 청춘은 우울해진다. ...

이런 우울감은 그저 정신적인 배고픔이다. 삶을 좀더 사랑하고 좀더 즐기라는 내면의 권고다. 

정상적인 우울감은 존중되어야 한다. 건전한 욕구를 충족시키면 즉시 해결된다. ...

비록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우울을 적대시하지 않고 우울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면 더 이상 우울이 증폭되지 앟는다. 그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철학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다. 동병상련이라는 표현처럼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대상있다면 우울증에 빠져도 얼마든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p221

만일 타인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잘해낸다면 좀 엉뚱한 생각을 하더라도 망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다양성, 창조적인 상상력이다. 오히려 삶을 진취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희망 에너지다. ...

희망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른다. 만일 누군가 나는 커서 저 달에 가고야 말거야라고 말하면서 전혀 실천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뭐가 됐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p220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게으를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이유를 나열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전부 비현실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 즉 망상이다. 


p222

본래 종교란 삶의 시녀여야 한다.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종교야 말로 진정 아름답다. 종교의 본뜻은 자기의 마음을 평화롭게 가꿔서 타인의 아픔까지 구제함에 있다. 

누가 진정한 종교인인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다.

누가 진정한 불자인가? 자비로운 사람이다.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가?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참된 종교는 개인의 정서적 안녕을 꾀하고 이웃과 국가 간에 화해와 평화를 부른다.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의 벽을 허물고 우리 삶의 윤활제로 작용한다. 이와 같은 기능이 없다면 그 종교는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종교적 망상에 빠지면 다툼과 갈등, 전쟁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서로가 합하여 조직을 이루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서로의 증세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망상은 위험하다. 마땅히 경계할 바다. 


p224

생각하지 않으면 어찌 얻겠는가

하지 않으면 어찌 이루겠는가

<서경> 상서 태갑하

망상에 빠지면 잔뜩 욕심을 지닌 채 대인관계가 원만하기를 바란다. 

게으름에 빠진 채 부와 명예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지 않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텅 비워야 할 마음을 자기만의 똥 덩어리 생각으로 가득 채운 것이 망상이요, 그 무게감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게으름이다. 

...모든 것이 편안하게 제공되는 환경에 처해 있다면 이러한 망상과 게으름의 굴레에서 나올 길이 없다. 반드시 건강한 자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바르게 생각하지 않거나 일하지 않으면 다소 춥고 다소 배고파지는 환경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환경은 성현의 말씀이 단비처럼 내리는 곳이어야 한다. 

망상과 게으름이라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공부가 시작된다. 그래야 변화한다. 


p235

정신분열병 환자가 자기수양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기수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집안의 아주 작은 일부터 실천하게끔 하면 된다. 설거지와 빨래 청소와 같은 기초적인 생활과제와 예의 범절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수양의 시작이다. 

이러한 실천형 심성계발과 함께 이해형 심성계발을 병행하면 흐트러졌던 생각드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는다. 겸허해지고, 감사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알게 된다. 자신의 병을 경계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여유가 생긴다. 

심의들은 정신분열병의 증상인 환청과 환시, 환각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이든 망상 속이든 무례한 원망과 비방은 궁극적으로 내 정신을 철저히 파괴할 뿐이라는 이치에 눈을 뜨게 해준다. 

또한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내가 맡은 일을 완수하고 남을 비방하지 않는 것만이 최선임을 깨닫도록 반복해서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은 처음에는 별 효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대부분의 정신분열병 환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깨진 독에 물 붓기다. 열 번을 해도 끄떡없고, 백 번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천번을 가르치면 마침내 달라진다. ...

내게는 어떤 일이라도 천 번을 반복하면 반드시 변화한다는 믿음이 있다. ..

심의들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그 물이 다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마음 세탁에 매진한다. ...

성현의 말씀을 읽고 쓰고 암송하는 것은 마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을 증강시키는 효과와 비슷하다. ..

정신분열병은 사고체계가 워낙 크게 교란되었기에 거의 불치병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열정과 신념을 가진 임상의에게는 난치병은 있어도 불치병은 없다. 끈기 있게 치료하지 않으면서 환우의 병일 낫길 바라거나,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정신분열병은 안 낫는다고 단정하는 사람은 책임 있는 의료인이 아니다. 지극한 저성으로 환자와 함께 꾸준히 수양해가면 정신분열병 역시 반드시 치료된다.


p239

숨이 붙어 있는 한 내 삶은 행복해야 하며, 또 실제로 행복하다. 볼 수 있기에 행복하고, 걸을 수 있기에 행복하고, 생각할 수 있기에 행복하고, 살아 있기에 행복하다....삶이 곧 행복이거늘, 강박심리하는 때가 끼어서 그 행복을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p241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 사실 사랑이란 멍쩡한 두 발로 길을 걷는 것 만큼니아 쉽다. 갈 길이 멀다 해도 한번에 욕심내지 말고 쉬엄쉬엄 걸으면 된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 

온화한 표정,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말투가 사랑의 문을 여는 열쇠다. ...지금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우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

우리는 나를 먹여 살린 생명체들 앞에서 미안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피해의식 타령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내게 피해의식이 일어난다면 마땅히 크게 반성할 바다. ...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피해의식과 억울함 분노, 증오, 원망은 내 안의 강바기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다. 내가 남에게 나쁘게 대했기에 남도 역시 나를 나쁘게 대할 것 같다는 그릇된 마음이다. 

해결책은 본성회복이다. 선하게 살면 된다.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게 곧 선이다. 피해를 적대시 하기보다 이를 포용하고 감수하는 순간, 그것은 피해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은 우주적인 나를 찾는 것과 같다. 그 큰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피해의식은 그저 강바기가 만들어낸 악몽일 뿐이다. 


p244

욕구 - 생존과 번영을 위한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발동력

욕망- 특정한 행위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의지

욕심- 과정을 생략하고 좋은 결과만을 얻겠다는 마음

불가에서는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이 감각기관이 감지하는 색, 성, 향, 미, 촉이라는 각각의 감각이 결합하여 욕구가 생겨난다고 한다. 이것은 본성의 발현 여부에 따라 요구일 수도 있고 욕심일 수도 있다. ..

아쉽게도욕심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관련된 명예욕, 이기심의 산물인 재물욕은 거의 욕심이기 쉽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풍요로운 자연과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

욕심은 버려야 하지만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결국 욕구불만에 빠지고 이로인해 각종 마음병과 신체적 질환이 뒤따른다. ...

그러면 왜 우리들은 본성을 잃고 욕심에 휩싸이는 걸까?

<황제내경> 상고천진론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때에 맞추어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려고만 하는 것은 인생의 참된 즐거움에 어긋난다. "

...우리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굉장한 흑자 인생이다. ...

우리의 선비들은 늘 깨어서 항상 마음의 때를 씻어냈다. 검소와 청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자연이 본래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그대로 누렸다. ...

필요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항상 겸허하고 만족할 줄 안다. 이렇게 살면 삶은 예술이 된다. 


p247

내 옷에 쇠똥이 묻은 걸 보고도 그걸 그대로 입고 다닐 사람은 없듯이 제대로 안다면 욕심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다. 오직 욕심이 누는 해악을 모르기에 자신을 삶의 고통 속으로 처넣고 있는 것이다. 

희미하게 아는 것은 욕심을 끊어내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 아예 모르면 차라리 겸손할 수 있는 법, 안다는 생각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앎이라면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철저히 궁리해야 한다. 무엇이 내 인생에 유익함을 주는지 사력을 다해 끝까지 다져봐야 한다. ...

욕심을 끊어 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큰 포부를 가져보는 것이다. 포부와 욕심은 다르다. 욕심은 악이지만 포부는 빈 마음으로서 크고 건전하며 선한 욕구다. 욕심은 사사로운 마음이지만 포부란 공의의 마음이다. 


p248

마음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분명한 자세를 가졌다면 포부가 큰 사람이자, 담력이 큰 사람이다. 꽃을 보는 재미와 걷는 기쁨, 말하는 즐거움 등을 누릴 줄 안다면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끌어간다면 어떻게 욕심따위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운동선수들은 자기만의 힘을 빼야 경기의 흐름을 탈 수 있고 효율적으로 힘을 쓸 수 있음을 잘 이해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버리는 것은 마음의 힘을 빼는 것과 같다. 


자기계발 서적을 탐독하는 사람과 종교적 수행자들도 욕심이라는 함정에 곧잘 걸려든다. 욕심은 강바기의 정밀한 조정을 받아 신과 진리, 자아에 슬쩍 끼어들기도 하고 영생과 구언, 해탈과 깨달음이라는 탈을 쓴채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러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수양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최소한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욕심이라고 불리는 마음병 만큼은 꼭 치유해아 한다. 


p252

물질적인 대상 외에도 우리에게는 자못 심각한 중독증이 존재한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기, 타인의 단점만을 물어 뜯기, 비압아히기 등도 모두 중독증이다. 여기에도 순간적인 쾌락이 존재한다. 남을 비방하는 데는 나름의 재미와 기쁨이 있다. 그런 기쁨은 칠정 중 희에 속하는 것으로 자기 발전에 해롭고 대인관계를 악화시킨다. 

일단 자신에게 나쁜 습관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심리적인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그 증상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브레이크를 밟는 한 결국 자동차는 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제아무리 강력한 중독증도 지속적을 자기수양을 한다면 반드시 해소된다. 

... 자기수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p256

진정한 원인해소는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지 앟는 거예요. 자기수양은 우울을 거부하는 마음에서 우울을 포용하는 마음으로 전환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울해도 문제가 되지 앟으니 원천적으로 재발이 되지 않는거죠.


p257

내게 어떤 증상이 있다면 그 증상을 발현시키는 기전이 있다는 뜻이에요. 원인이 있으니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해요. 바로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왜 내게 이런 증상이 있어야 하느냐며 현실과 싸우려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증상에 얽매이는 거예요.

성현의 가르침은 햇빛과 같고 물과 같아요. 마음공부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새 내 영혼이 성장하고 그러한 성장 속에서 증상들은 녹아 없어지게 되

죠. 이제껏 집중하지 않았기에 증상이 남아 있는 거예요. 증상이 남아 있다면 이를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정하고 더욱 겸허해져야 해요.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묵묵히 자기를 수양하면 마음병이 낫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p258

깨치미가 찾아오면서 우울해도 되고 불안해도 괜찮고 혼란스러워도 좋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이때 지속적으로 자기수양을 해 나가면 한순간의 믿음이 점점 성장하여 일상생활 전체로확산된다. 


p259

주자 선생의 뜻도 이와 같았다. 선생은 <소학>의 전편을 통해 "물 뿌리고 비질하며 윗사람과 응대하기"를 수시로 강조했다. 자기수양은 일상의 작은 일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관건일 뿐, 결코 거창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p260

나는 20여년의 임상을 경험한 심의로서 자기수양을 시작함에 있어 반드시 유념해야할 사항을 다음의 네 가지고 요약해보았다. 

첫째, 성현의 말씀이 담긴 경전과 그 뜻을 펼친 양서를 항상 가까이 한다. 

둘째, 내가 가진 나쁜 습관이 매우 강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깔보지 않는다. 

셋째, 겸허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갈고 닦되,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넷재,  내게 진정 유익한 길이 무엇인지 늘 깨어 헤아린다. 


p262

음양이 화평한 사람은 

어디에서든 정신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머물게 한다.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크게 기뻐하지 않으며

유순하게 사물과 동화되어 다투는 일이 없고

항상 때에 맞춰 적절히 변화하고 대처한다.

지위가 높을 지라도 겸소하며, 낮을 지라도 아첨하지 않는다. 


p264

나는 일련의 시련과 경전 속 성현의 말씀을 통해 존재에 대한 순응과 겸허함이야말로 인생의 최고 가치라는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내가 잃은 것은 단지 내 욕심과 집착의 소산물뿐이었다. 하늘은 내가 가진 불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음으로써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주었다. 

'모든 것이 부서진 지금, 예전에는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러셨지. 좋아 . 그럼 새롭게 살아보자. 나는 아직 숨 쉬고 살아 있잖아!'


p275

성현께서는 행복이란 청렴함과 검소함에서 생겨나고, 덕성은 겸허함과 낮아짐에서 생겨난다고 말했어요. 청렴하고 검소해야 풍요를 누릴 수 있어요. 사치스럽게 살면 늘 빈곤해질 뿐이에요. 겸허한 자가 가장 당당하죠. 검소와 풍요, 겸허함과 당당함, 그 둘은 같은 의이예요.

자기를 수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겸허하다. 겸허하게 사는 것은 내 고집을 꺾고 무한한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특유의 당당함이 묻어난다. 겸허한 자에게는 시기할 수도 없고, 질투할 수도 없다. 시기와 질투가 기생할 대상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뜻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겸허한 자세가 요구된다. 겸허한 여기저기 흩어진 우주적 자산을 흡수할 수 있는 빈 그릇과 같다. 겸허의 창을 열지 않는다면 이 찬란한 우주의 축복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지금 어떠한가

내가 바라는 것이 크다면

그것을 담아낼 겸허의 미덕이 있는 걸까?


p277

본래 참회란 죄를 지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참회해야 할 정도로 내가 죄를 짓고 있을까? 그렇다. 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내 생활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곧 내 삶에 대한 죄다. 특히 다음의 경우에 포함된다면 반드시 반성과 참회가 필요하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 ..


p280

<논어> 학이편에는 증자께서 하루에 세번 다음과 같이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을 대할 때 정성으로 다했는가? 

친구들을 사귈 때 믿음으로 대하였는가?

배운 바를 내 것을 만들었는가?


대충 살려는 사람에게 삶은 늘 힘들다. 그러나 내 잘못을 되돌아 보고 반성과 참회에 힘쓰는 사람에게는 강바기가 붙어 있을 곳이 없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의 삶은 늘 즐겁고 쉽고 재미있다. 고요하면서도 내적인 역동감이 올라온다. 


...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내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종이에 찍힌 잉크무늬에 불과할 뿐이다. 마음공부는 최소 천 번의 반복이 필요하다. 천번이라해도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루 세번 성찰하면 1년이면 족하다. 하루 한번만 해도 3년이면 충분하다. 내 인생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p281

부지런함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이며

삼가 조심함은 몸을 지키는 부적이다. 

<명심보감> 정기편


부지런해야 할 바는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책무요, 삼가 조심할 바는 화풀이와 비방, 원망이다. 부지런해야 우리의 삶은 항상 여유롭고, 화풀이를 삼가야 내 마음이 늘 평화롭다. 

수양한 만큼 참회가 이뤄진다. 참회는 깨치미의 주특기다. 반성하고 참회하면 과거의 잘못과 부족한 것으 모두 소멸된다. 참회할 수록 강바기는 무력화되고 내 마음의 때가 싹 씻어지고 과거는 깨끗하게 청소된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된다. 


p284

동양에 살든 서양에 살든, 삶을 즐기는 자의 행복을 이길 자는 없다. 디오게네스도 그랬다. 세계저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렸던 알렉산더가 거지 디오게네스를 찾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마침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디오게네스여, 내가 그대를 위해 도와줄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해보오"

"한 발 옆으로 비켜주시지요. 왕께서 햇볕을 가리고 계십니다"


p287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기에 삶의 에너지가 충만하죠. 그 결과 자연히 성실하고 부지런해져요. 따라서 새로운 욕구와 건전한 의지가 올라오게 되죠. 결코 현실에 안주하는 나태한 태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한자 중에 발을 뜻하는 족이라는 글자는 '만족'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제 발로 걸을 수만 있어도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

인생의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우리들은 성취한 목표를 이루기도하고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과정에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것이 곧 인생의 목표를 이룬 것! 그는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다. 그러하기에 만족과 감사함을 아는 삶에의 도전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멋지다. 


p291

심성계발에 있어 완성형은 없다. 마치 밥을 먹고 세수하고 목용하는 것처럼 꾸준하게 실천해야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다. 


p292

학문의 도는 별다른 것이 없다. 흐트러짐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전부다

<맹자> 고자


p295

예절에서 예란 배려와 존중을 뜻한다. 배려는 상대의 부족함을 감싸고 도와주는 것이요, 존중이란 상대의 존재와 영역을 인정하고 그 공간을 침범치 않는 것이다. 이런 예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예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끊어줘야 한다. 이것이 곧 절이며 군자가 경계해야 할 사물이다. 

사물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며, 듣지 말며, 말하지 말며, 움직이지 말라"는 네 가지 가르침을 말한다. 


p296

상대가 비인격자라면 나를 멸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사정일 뿐 나와는 무관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상대의 반응을 살필 필요가 없다. 내가 상대에게 예를 취했다는 그 자체로 만족할 줄 아는 게 예다.

오염된 물과 유해한 음식을 먹거나 독한 가스에 노출되면 몸이 건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방과 원망, 화풀이가 횡행한다면 그곳은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 모두에게 유해한 환경이다.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타인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환경에 가지 않는게 절이다.

예가 없는 사람을 끊어내는 것은 단지 사람을 멀리함이 목적이 아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상대와도 다시금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기위함이다. 예가 없는 환경이나 예가 없는 사람을 끊어줌으로써 내 마음속 미움과 원망이 자라나지 않도록 관리하게는 게 곧 절의 근본적인 이유다. 

예절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기 전에 상대의 의견을 물어 볼 줄 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면 이를 결코 캐려하지 않는다. 


p297

비방과 비판은 완전히 달라요. 비방을 자기의 감정을 실어서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지요. 비판을 상대의 허물에 대해 감정을 배제한 채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고요. 비판은 필요해요. 건전한 비판은 예절에 어긋나지 않아요. 그러나 비판을 할 때도 나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해요.


p298

지란지교는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교제를 말한다. 상대의 행복을 내행복으로 느끼는 사귐이다. 이러한 사귐은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의 공간과 사생활을 지켜줄 수 있는 자신감과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