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월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여행길 2012. 12. 2. 17:21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p57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이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와 토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하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진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송나라 사람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는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은 특정한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느 차이의 주체, 즉 코기토가 결코 발생할 수 없다. 이 점은 송나라 사람이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바깥에서부터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반면 이방인은 송나라와 오나라의 사이, 혹은 월나라와 오나라의 사이에 서 있던 존재이다.

 

p64

중재가 가능한 논쟁은 진정한 논쟁이 아니며, 진정한 논쟁은 중재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역설을.

여기서 중재가 가능한 논쟁이란 논쟁의 양측이 모두 동일한 공동체의 규칙을 고유하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논쟁을 말한다. 반면 중재가 불가능한 논쟁이란 논쟁의 양측이 서로 다른 공동체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이루어지는 논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송나라 상인과 월나라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가 말한 대로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중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의 실마리는 바로 동일한 지점에 함께 놓여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란 어떤 합리적 수단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애초의 논쟁의 해결과 타자와의 만남이란 사건은 양립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타자와 마주쳤을 때 우리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낯섬과 차이는 끝내 해소될 수 없다는 말인가? 장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대붕이 될 수 있고, 마침내 타자와 소통할 수도 있다는 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을 받아들일 때, 차이를 가로지르는 비행이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진다면, 이제 장자 철학의 핵심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된것이다.

 

p68

장자도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들보다 앞서 타자를 발견했고 그 문제를 끈덕지게 사유했던 철학자이다. 어느 경우든 타자의 발견이란 사건은, 나 자신이 나만의 규칙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동시적인 사태이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이나 레비나스를 넘어서는 어떤 측면이 있었다. ....

장자가 제안한 한 가지 방법을 살짝 엿보도록 하자.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에 의존해 중 中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인간세

 장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수레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장자는 타자를 수레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사실 자신이 익숙하게 타던 수레를 버리고 새로운 수레를 탄다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우리에게 수행하라고, 그리고 그 위험을 감당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장자의 권고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권하고 있는 행위는 너무도 위험한 거의 "목숨을 건 비약"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것은 친숙함을 버리고 낯섦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속 50km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에서 시속 70km나 30km로 달리는 자동차로 뛰어내리는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라. 새로운 자동차에 몸을 싣자마자 우리는 기존의 자동차에서 가지고 있었던 균형감각이 동요되는 경험을 하며 기우뚱거리게 될 것이다. 이미 낯선 속도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는 내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고유한 속도로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새로운 자동차의 속도에 맞추어서 새로운 균형 감각, 즉 중 中을 기르는 것뿐이다. 만약 새로운 자동차에서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자동차와 소통하는데 이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넘어진다면 우리가 자신의 삶마저도 버려야 할 상황에 이를 지도 모른다. 장자의 사유는 타자와 소통할 때 생기는 위험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숙고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친숙한 자동차로부터 낯선 자동차로 성공적으로 비약할 수 있으며, 나아가 새롭게 발을 디딘 자동차와 소통하여 새로운 균형 감각을 확보할 수 있을까?

 타자와의 마주침은 우리에게 흔히 두려움과 절망감을 안겨준다. 이렇게 타자와의 마주침이 겉보기엔 단순히 불운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일종의 행운으로 반전 될 수 잇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신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따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힘들다. 오직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특정한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따랐던 삶의 규칙은 이제 대상화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강압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억압적 분위기에 익숙해진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작고 어려서 아무런 힘이 없던 그 아이는 권위적인 삶의 규칙을 내면화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내면화된 삶의 규칙은 아이가 집밖을 나설 때까지는 결코 대상화되지 않는다. ...이 아이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복종해 왔던 권위적인 삶의 규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일종의 작은 결단 하나를 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통제 받아온 나의 삶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권위적인 삶의 규칙에 다시 복종하여 모범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가? ....결국 타자와의 우연한 마주침이 아이에게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주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78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은 기꺼이 화이트버드를 타고 영국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오해려 영국을 버리고 스페란차에 남으려고 한다. 이미 그는 스페란차와 방드르디라는 예기치 못한 타자와 소통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국가주의와 종교주의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종교는 모두 초월적인 목적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며 지배하려고 든다. 그것은 현세의 부유함이나 명예 혹은 내세의 행복이라는 등의 다양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미 로빈슨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받치고 있던 땅 스페란차와 자신을 비추고 있는 태양을 가리켰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침내 그는 일체의 초월적인 가치에 현혹되지 않는 삶,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삶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던 삶의 규칙에 대해 전혀 반성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기존의 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또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겠는가? 로빈슨이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까지 자그마치 28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p85

초나라 군주가 재상의 자리를 제안했을 때, 장자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훼손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재상의 자리면 국가라는 조직 안에서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자리이다. 그러나 장자는 반문하고 있다.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국가가 중시하는 어떤 가치보다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장자가 주는 답은 분명하다. 그는 국가가 제공하는 일체의 안락보다는 개체의 고유한 삶이 주는 경쾌함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와 통치자에 자신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국가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제국을 소유하려면 통치자가 무위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권했기 때문이다. 반면 장자는 노자와는 달리 분명한 아나키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국가의 가치를 부정하고 개인의 삶이 지닌 유쾌함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장자는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살육과 혼란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 노자가 철저한 국가주의를 선택한다면, 장자는 국가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개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제공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상을 묶는데 사용되는 도가사상이나 노장사상이란 범주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사후에 구성된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의 철학을 장자의 사유로 읽어내려는 것, 다시 말해 국가주의를 아나키즘으로 독해하는 것....이런 시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국가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는 아나키즘을 채용하는 사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발적 복종을 낳기 위해 고안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 즉 현대의 자본주의 국가체제의 이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체제에서 상상럭으로만 자유가 존재할 뿐, 실제적으로는 국가의 압도적인 우월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p92

장자는 삶의 철학자였다. 이것은 그가 개체의 삶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긍정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사상을 공격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유가에 따르면 인仁이라는 숭고한 목적에 비추어 개체의 삶은 얼마든지 수단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자도 유가의 모토의 하나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가를 비판했던 묵가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묵가들 역시 차별이 없는 사랑, 즉 겸애라는 이념으 ㄹ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리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장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유는 모두 개체의 삶보다는 초월적 이념을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을 부정하고 죽음의 우울함 혹은 초월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철학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초월적 이념을 표방하는 모든 태도를 꿈이라고 비유하면서, 반드시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도교는 삶의 철학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타락시켜 버렸다. 이제 장자가 옹호하고자 했던 삶의 철학은 '불로장생'이란 이념으로, 그리고 신선에 대한 종교적 욕망으로 변질되고 만것이다. 삶의 철학은 삶 자체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점에서 삶의 철학은 삶을 초월하려는 일체의 종교적 태도와 구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자가 자신이 지지했던 삶의 철학이 종교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나라에 선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위 굴 속에 살면서 골짜기 물을 마시고 지냈습니다. 민중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았고, 나이가 70이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빛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혀버렸습니다 "  -달생

 장자에게 있어 선표라는 인물은 역사를 앞서 이미 도교 수행자와 같은 존재를 상징하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장자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선이라는 도교의 이념이 단지 관념적인것, 즉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장자의 사유는 노자의 국가주의에 오염되는 비극을 겪은 뒤, 다시 도교라는 종교에 의해 은폐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모색했던 삶의 철학이 가진 진실은 결코 소멸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의 철학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중국철학사에서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 이래 가장 과격했던 삶의 철학자 선사 임제를 만나게 된다. 임제 스님의 사자후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 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임제, 임제어록

여기서 우리는 그의 무위진인이 어떤 초월적인 인격을 상징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임제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그의 논의가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지평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벌거벗은 신체'즉 살아 있는 주체라는 차원이다.

무위진인이 지닌 근본적 자리, 그것은 벌거벗은 신체,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결국 임제는 삶을 넘어서서 삶을 검열하는 어떤 초월적 가치라도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참다운 사람,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꿈으로부터 깨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무위진인이라는 것은 일체의 초월적 가치로부터 해방된 살아 있는 주체였던 셈이다. 임제는 우리가 자유로운 삶의 주체, 즉 무위진인이 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 임제어록

임제에게 있어 해탈이란 거짓된 이념들을 벗어던지는 것, 즉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깨달은 자, 즉 부처를 만나면 우리 자신은 깨닫지 못한 자라는 자리位에 서게 된다. 스승을 만나면 우리는 제자라는 자리에 서게 된다. 부모를 만나면 자식이라는 자리에 서게 되고....이렇게 선택된 우리의 자리는 모두 열등한 자리, 명령르 따라야만 하는 자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만난 것들을 탁월한 것,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로부터 우리의 삶은 부족한 것으로 태생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결국 임제가 부처와 부모를 죽이라고 말했던 것은 실제로 그 구체적 대상들을 죽이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대상들을 초월적인 목적, 즉 내가 본받아야 할 숭고한 목적으로 간주하는 전도된 관념을 죽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가치가 부각되면, 우리의 삶은 부정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삶을 긍정하는 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우리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긍정하고 일체의 초월적 가치를 거부할 때, 과연 초월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기존의 공동체가 우리 삶을 그대로 좌시하기만 할까? 국가, 자본, 종교, 가족 등이 마련해준 자리를 거부할 때, 우리는 과연 어렵게 되찾은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로운 삶의 주체들이 연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연대의 구체적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장자를 다시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p104

타자가 자신의 선입견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새를 사랑한다고 자신하더라도 이런 확고한 자신의 판단과 애정이 오리혀 새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나라 임금은 "새 역시 사람을 양육하듯이 키우면 잘 자라겠지"라고 믿은 자기 선입견의 노예였던 셈이다.

 장자의 생각에 따를 때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타자가 속한 새로운 삶의 규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우리는 자신의 선입견을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선입견은 철저하게 나쁜 것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닷새와 마주치기 전에 노나라 임금이 가졌던 선입견은 사실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

우리는 대한민국, 한국어, 그리고 나의 가족을 선택한 적이 없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사실들이다. 문제는 특정 공동체에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공동체의 여러 규칙들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장자도 이미 우리가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장자는 우리의 옳고 그름, 즉 시비를 따지는 마음 자체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이것을 유명한 성심의 논의로 명료화했다. 글짜 그대로 구성된 成 마음 心. 이것은 특정 공동체에 살도록 내던져졌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기존 공동체의 흔적이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던진 반문, 즉 "성심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제물론) 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만 타당할 수 있는 성심을 모든 공동체에 혹은 모든 타자에게도 통용될 수 있다고 맹신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가 숙고했던 것은 특수한 성심을 보편적인 것, 즉 '스승'으로 간주하려는 사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

흔히 물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물이 빨아들이면 그것에 저항하고 반대로 물이 밀어내면 또한 그것에 저항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너무도 익숙하게 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땅과 '마추지면서'우리는 이미 땅에 어울리는 형태의 '배치와 결합'을 구성했던 것이다. 물과는 달리 땅은 우리를 빨아들이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수영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물에서 그토록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물과의 새로운 연결을 거부한다는 것, 다시 말해 따으로부터 유래한 하나의 성심을 무의식적으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물과 새롭게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헤 해야 할까?

 수영의 비법에 궁금증을 가진 공자에게 수영의 달인은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물속에서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땅에서 얻어진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지금 직면한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이야기이다. 땅과는 전혀 이질적인 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그 흐름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말일 것이다. ...수영의 달인은 물과 땅의 두 영역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성심을 자유롭게 구성할 줄 알았다. 그가 공자보다 탁월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

우리는 기존의 성심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이 모험이 항상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모험의 성공은 나의 역량만이 아니라, 내가 마주친 타자의 역량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수영의 달인이 결국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도 다름 아닌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p122

우리는 대붕의 비사이 남쪽으로 날아가기 위한 예비 작업에 불과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나를 가두어 놓은 시스템의 높은 장벽을 넘어설 정도의 고도를 확보하기 위해 대붕은 비상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수직적인 비상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초월의 형식은 대붕의 비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특정 시스템에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특정한 시스템에 속박되어 있다면, 초월이란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

몇명 연구자들은 장자가 말한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을 오히려 일상으로부터의 초월이라고 이해하곤 한다. 이것은 장자의 사유를 신비주의로 몰고가는 치명적인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자에게선 꿈이야 말로 그릇된 초월에늬 의지를, 그리고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은 이런 형이상학적 욕구를 포기하려는 결단을 상징하고 있다. ...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했던 사례 한가지를 더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방 안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방 안에서 나가려면 그는 문손잡이를 잡고 자신 쪽으로 문을 잡아당겨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방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문을 밖으로 밀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결코 방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이 점에서 그는 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p133

세계에는 다양한 시스템들이 존재하고 따라서 수많은 타자들이 존재한다....이런 임계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순느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타자에게 그대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꿈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타자가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배우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는 삶의 길이다. 여기에서 장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삶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의 길, 다시 말해 형이상학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든가 아니면 타자의 삶을 파괴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

"삶에는 한계가 있다"(양생주)는 말로 장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유한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

초월적 가치들은 우리 삶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유래한 것일까? 부르디외나 장자라면 초월적 가치의 유래를 최초의 우리 삶이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영위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찾을 것이다. 태어날 때 우리에게는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는 능동성이 허락되지 않는다. ....

자유로운 개체들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모든 공동체에서, 개체의 삶이라는 것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밖에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지상의 목적으로 따라서 자신의 삶을 그것에 복무하는 수단으로까지 간주하는 환각에 빠진다. 물론 이런 현상은 공동체가 사용하는 수단, 즉 상과 벌에 의해 강력하게 현실화된다. ...그러나 처벌만으로는 개체들을 공동체의 규칙에 완벽하게 편입시킬 수 없다. 오히려 개체들로 하여금 목숨을 건 투쟁을 유발하도록 만들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벌에 대한 공포는 상에 대한 강력한 욕망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상에 대한 욕망은 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리고 벌에 대한 공포는 악에 대한 죄의식으로 내면화된다. ....마침내 이런 방식으로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인 가치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삶과 유사한 어떤 것을 영위하게"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에게 주어진 첫번째 공동체에서 우리 삶은 모든 초월적 가치들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삶은 검열되고 심판받는 대상, 즉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무엇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속에서는 우리가 타자와 직접적으로 만나고 그와 더불어 새롭게 연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타자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p139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특정한 공동체에 던져진 존재이다. 또한 우리는 이 공동체의 규칙을 아비투스롤 내면화 할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이것을 성심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심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로 자의식이다. 우리의 자의식은 타자와 조우하면 동요되고 와해되는 경험을 겪는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성심을 우리가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타자와 마주쳐야 비로소 판단중지가 발생하고, 판단중지가 일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타자와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것을 '양행 兩行'이란 개념으로 명료화 한다. 다시 말해 타자서 그리고 판단중지와 관련된 두가지 원리 兩은 함께 적용될 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타자로 경험된 원숭이들의 분노를 즐거움으로 바꾸기 위해서, 저공은 그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제안한다. ...저공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제안들을 부단히 제공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그 제안들을 옳은 것으로 확증하는 것은 원숭이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인시 因是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개념은 곧 '타자가 옳다고 하는 것을 따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타자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한 판단중지 상태에 놓이도록 만든다. 판단중지의 상태가 중요한 이유는 저공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타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만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부단한 판단중지의 상태... 이 긴장된 균형의 상태를 장자는 천균 天鈞, 즉 자연스런 가지런함 이라고 설명한다. ...장자가 강조한 양행의 실천원리는 "옳고 그름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편안해 한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간명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리, 즉 타자의 시비 판단에 따르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마음을 비워 두는 것은 상호 필수불가결한 원리일 수밖에 없다. 이때문에 장자는 두 가지 원리의 병행인 양행을 강조했던 것이다. ....

그런데 천균에서 편안해 한다라는 장자의 표현에서 우리는 어떤 안일한 순응주의나 정적주의를 읽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판단중지의 상황이라고 풀이한 천균의 상태는 단순히 고요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상태는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의 모습처럼 강렬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동성에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맡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타자의 타자성에 부합될때까지 부단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주체의 끈덕진 의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입장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부합되는 새로운 관점을 고안하고 생성하는 능동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저것 彼과 이것 是이 자신의 짝을 잃은 상태를 '도의 지도리'(도추道樞)라고 부른다. 도의 지도리는 원의 중심 環中을 얻어서 무한하게 타자와 감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옳음 是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되고, 그름非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된다.(제물론)"

천균이라는 개념에서는 회전하는 물레의 비유가 중요했던 것처럼, 도추라는 개념에서는 지도리, 즉, 추라는 비유가 중요하다. 문이라 기본적으로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지만 동시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문으로 하여금 이런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문의 '지도리'이다. 결국 지도리가 없다면 문은 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자신의 짝을 잃은 상태란, 우리가 자신이 주체인지 아니면 타자인기를 결정할 수 없는 어떤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우리에게서 "나는 나다"라는 식의 확고한 자의식은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자신이라는 내부와 타자라는 외부의 경계선 상에, 즉 문지방에 서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런 상태를 도추라고 이야기 한다. ....

판단중지의 상태란 실은 태풍의 눈과도 같은 상황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태풍의 주변부는 너무도 거칠고 위협적이지만 그 중심부는 고요해서 맑은 하늘이 보일 정도로 안정되고 평온하다. 겉으로 보기에 이 중심부는 마치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태풍의 중심부는 단순히 비워져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곳의 비어 있는 상태란 강렬한 태풍을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내부가 더 비워지면 비워질 수록, 태풀의 파괴력은 더 엄청난 법이다.

...장자는 이런 판단중지의 상태를 비울 虛이나 망각 忘이란 개념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움이나 망각이란 개념에서 죽음에의 의지나 허무주의와 같은 감정들을 읽어내서는 안 된다...이 점에서 우리는 망각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강조했던 니체의 다음 논의를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가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망각이란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힘, 기억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모래성을 만들고, 또 파도에 따라 부서지는 모래성을 보고 까르르 웃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아이는 왜 자신이 애써 만든 모래성이 속절없이 파괴되는 것으 보고 즐거워하는가? 그것은 이 아이가 파도가 휘몰고 간 그 자리에 다시 새로운 모래성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황페한 모래사장에서 파괴가 아닌 생성의 가능성을 엿보는 이 아이는 얼마나 차라투스트라를 닮아 있는가?

만약 부서진 모래성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좌절과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면 이 아이는 이전처럼 유쾌해질 수 없을 것이다.

 

p152

장자에 따르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은 성심이란 형식으로 우리에게 내면화되며 이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길 때 우리의 자의식이 출현하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의식을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던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유아론적인 꿈에서 깨어나 삶의 세계로 진입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장작 잊어야 함을 망 忘이나 상 喪이란 글자가 아닌 외 外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외外라는 글자 그대로 바깥으로 보내다. 혹은 도외시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따. 그렇다면 이 외라는 개념은 자신의 생각 속에 정립된 세계, 외부대상 그리고 삶을 바깥으로 몰아내서 나의 마음속을 비운다는 의미를 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상상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세계, 외부대상 그리고 삶을 바깥으로 추방한다고 해서,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실제 세계나 외부대상이 사라지거나 혹은 우리의 삶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붉은 선글라스 하나만 벗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의 진정한 색깔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세계라는 가장 외적인 것으로부터 삶이라는 가장 내면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비워냄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조철이라는 마음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조철은 아침朝에 여명이터지는徹(뚫을 철) 경관을 비유하여 표현한 개념이다. 이것은 역으로 천하에 대한 일상적인 관념, 외부대상에 대한 일상적인 관념 그리고 삶에 대한 일상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마음 상태가 마치 빛이 없는 암흑 같은 유아론적 상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빛이 없는 밤에는 모든 것들이 무분별의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에 사물들은 모두 나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반면 아침의 여명이 비추면 무분별의 상태에 있던 모든 것들이 구별되어 내 앞에 다양하게 펼쳐진다. ....

견독 見獨의 상태란 우리가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견독의 상태를 삶의 유한성을 발견한 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p188

만약 수영하는 방법을 그 교본을 완전히 배웠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과연 우리는 수영을 잘 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쉽게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p193

결국 우리에게 남는 글귀는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어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전일하게 하라는 것이 심재의 마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라면 부득이한 일에만 깃들어라 라는 것은 타자성에 몸을 맡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부득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내가 멈출 수 없는 것"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타자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라고 섣부르게 생각했던 모든 방법들을 부단히 제거해야만 하고, 어떤 매개도 없이 그냥 타자에게로 비약해 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최종적인 조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날개가 없이 날아라!" 타자와의 연결을 보장하는 미리 설정 된 어떤 매개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매개가 미리 존재한다면 그 타자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타자일 수 없는 법이다. .....

 

p215

그렇지만 매번 근육과 뼈가 닿은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십합니다 라는 포정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는 타자의 미세한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p221

여기에서 루소가 폭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국가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국가는 원초적인 폭력, 즉 원초적인 수탈을 통해서 피통치자들을 결핍의 상태로 만들고 수탈한 것을 제한적으로 수탈당한 자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피통치자들의 결핍 상태를 심화시키는 기구이다. 이러한 원초적 수탈과 재분배의 계속된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설정해 놓지 않았다면, 지배와 복종의 메커니즘은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오늘 하루 어떤 이가 나의 물건을 빼앗고 보금자리를 강탈해도 나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면 그뿐이다. 아니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것을 빼앗은 자가 역설적이게도 나를 도와주는 자가 된다면 나는 영원히 이런 예속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에게서 빼앗은 자들을, 오히려 나의 선천적 결핍을 채워 주는 은혜로운 자라고까지 착각하게 된다. ....

고진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해 힘의 우월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지속적으로 원활한 약탈을 보장하기 위해 재분배를 실시하는 폭력기구이다. ....그들은 자신이 강제로 빼앗기고 있는 세금을 국가의 재분배 행위에 대한 타당한 대가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국가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오래된 착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p224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 사물의 현실적인 본질이다. (에티카)

자신들의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앞을 비워 두려는 힘 및 의지(알튀세르)

노나라에는 애태타라는 추남이 한 사람 살고 있었는데, 그는 비움에 성공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타인을 지배하려고 한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타인들이 발산하는 모든 미세한 기호들에 마음을 열어두고, 그들과 연결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애태타가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자기 앞을 비워 두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자유의 공간이라는 공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유의 공간으로 타인들이 몰려오는 것이며, 이 속에서 그 타인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227

물은 바람이 불면 동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권력, 부, 아름다움 등 일체의 초월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하나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일체의 초월적 이념들을 제거한 애태타의 마음은 파문이 일지 않는 고요한 물에 비유될 수 있껬다. ...그들은 애태타에게서 어떤 표준이나 전형을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늙었든 젊었든 아름답든 추하든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사는 자기 모습을 본 것이다. ...무엇과도 환원불가능한 자신의 단독적인 삶 그리고 그 삶이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진정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

장자에 따르면 자발적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 부, 아름다움 등의 초월적 가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한다. ....

국가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진단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를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이라도 말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한다. 물론 그 대가로 국가는 피지배층에게 일정 정도의 권력, 부 그리고 미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이로부터 국가는 피지배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전도된 생각이 출현한다. .....

드디어 우리는 장자가 제안했던 삶의 강령, 즉 잊어라!그리고 연결하라!의 최종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주의를 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국가주의 속에서 개인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국가나 국가가 설정해 놓은 가치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되어도 좋을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공동체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삶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한 목적으로 긍정하게 될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낭시는 이런 새로운 공동체를 "무위의 공동체"라고 부른 적이 있다. ...

어떤 초월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작업 속에서 개체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가 없다. 이런 작업 속에서 우리나 타자의 삶은 단지 초월적 원리라는 숭고한 목적에 종사해야만 한느 수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를 이야기 한다. 이 무위의 공동체는 자신과 타자의 삶을 위해서 초월적인 원리나 목적을 거부한다. ....

한순간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장자가 권하고 있는 소통의 진리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즐거움과 동시에 연대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비움이라는 망각의 수양론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포함한 일체의 꿈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되찾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연결이라는 실천적 강령을 통해서 타자로 하여금 삶을 되찾도록 하고, 나 또한 그와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 즐거움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장자의 기쁨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마주침과 삶의 고양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자와의 연결 혹은 연대가 봄春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타의 삶이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서 경쾌해지고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p237

사실 산행의 진정한 즐거움은 우리의 마음을 철저하게 비우도록 하는 데 있다. 특히나 험준한 산은 우리에게 하염없이 겸손하기를 요구하며, 일체의 잡념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겨울 소백산 능선에서의 겨울바람은 나의 혼을 빼놓는다. 마치 바람이 모든 찌꺼기와 먼지를 쓸어가듯이, 능선에서 마주친 여러 바람들은 나 자신을 비우게 만들어 버린다. 아니 나 자신이란 생각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

 

피리 속을 비워야 하는 이유는 바람과 마주쳐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다. 마음이 비워져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비워짐음 열림과 동의어이다. 비워질 때에만 나는 마주치는 타자를 내 마슴속에 담을 수 잇는 법이다. 내 마음의 피리는 오직 그 경우에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오직 이럴 때에만 나는 진정한 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해서 만들어지는 연결과 연대의 아름답고 흥겨운 하모니! ....

장자가 비우거나 망각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소음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소음들이 우리 자신이 가진 삶의 힘으로 부터 표현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이념의 지배를 받을 대 발생하는 신음솔라는 점이다. 초월적인 이념을 절대적인 목적과 가치로 숭배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게 된다. 결국 우리 내면의 소음들의 진정한 기원은 우리 자신의 삶 자체라기 보다는 초월적 이념이었던 셈이다. 초월적 이념은 국가나 종교에 의해, 혹은 현재의 상황이라면 자본에 의해 만들어져서 우리 내면에 각인되어 있는 감시자라고 할 수 있다. ...

일체의 초월적 이념들이 주인 노릇을 할 때, 우리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부족하여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장자는 바로 이런 전도된 상황을 뒤집어 삶의 긍정성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움이나 망각으로부터 어떤 초월에 의지도 발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세계로의 수평적인 열림을 위한 첫 출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워야 하고 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아니다.